배우가 꽃을 피운다, 그 꽃의 자양분을 대자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고 박해영 작가는 “썼다가 엎고 생각나는 대로 끼적였다 버렸다 하며”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보는 눈이 없으면 딴짓하는 편”이라 동네 카페 서너 군데를 돈다고 했다. “아침 9시 이전에 나가서 밤 10시까지 앉아 있다 들어오려고 해요. 진짜 일해야 하는 때가 오면 스터디 카페에 종일 앉아 있어요. 사람이 있으면 눈치가 보여서 뭐라도 하거든요.”
<나의 해방일지> 속 미정이 퇴근 후 카페에 앉아 일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그지 같은 일도 아름다운 일이 돼요. 견딜 만한 일이 돼요. 연기하는 거예요. 사랑받는 여자인 척.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척.” 지금의 처지를 견디게 하는 상상, 누구나 해봄직한 상상. 카페에서 글을 쓰며 떠올린 것이냐고 묻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땐 제가 아마 염미정이었을 거예요.”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뭘 죽여도 문제없어. 마음에 걸리면 벌레만 죽여도 탈 나.”(<나의 아저씨>)
- <나의 해방일지>의 대사 중 특히 미정의 말들이 제 마음 밑바닥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더라고요. 작가님 역시 자기감정을 관찰하고 파고드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 가만히 보니까 제 감정이 하루에 50번 넘게 바뀌는 것 같더라고요. 지루했다, 좋았다, 이랬다 저랬다. 그중에 크게 걸리는 감정을 빨리 캐치해요. 나쁜 감정이 올라왔을 때 어느 순간부터 그 감정이 올라왔는지 생각해요. 한번은 작업실에 가려고 흥얼거리면서 집에서 나왔는데 공원을 지나고 뒤돌아보는데 공원 중간쯤부터 감정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왜 기분이 안 좋아졌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화를 받았어. 상대방이 좋다고 한 얘기였는데 난 불편해졌네. 아, 시기했구나. (웃음) 갑자기 좋아졌을 때도 어느 지점에서 좋아졌는지 찾아보고요. 이렇게 감정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을 계속합니다.
- 그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어떻게 대사나 이야기로 발전하나요.
= 누구랑 싸울 때 말에 꼬리를 잡고 가면 대화가 겉돌잖아요. 네가 잘못했어, 아니야 네가 잘못했지. 보통의 말싸움은 이런 말의 반복이고 얘기가 지루해져요. 상대가 저 말을 왜 하는지, 감정의 베이스가 뭔지 빨리 캐치를 해야 하잖아요. 대본을 쓸 때 그렇게 하려고 해요. 한줄 써놓고 이 말이 왜 나왔지? 아, 알아달라는 얘기구나. 그럼 상대방이 그걸 캐치하고 받아치든가, 두번 더 가서 받아치든가 해야 하는 거죠. 한줄 한줄 ‘이 말이 왜 나왔지’ 계속 봐요. 그냥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 “내가 영화를 혼자 봐서 헤어진 걸로 만들고, 걔가 새벽에 딴 놈이랑 톡해서 헤어진 걸로 만들어야 돼. 절대로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인 거 그게 들통나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창희의 투덜거림 속에 드러나는 자기 성찰은 그렇게 빚어진 거군요.
= 대사의 골조는 빤하고 하고자 하는 말의 핵도 빤해요. 자기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한 페이지 분량으로 중언부언할 얘기도 사실 한줄로 딱 끝내버릴 수 있거든요. 웬만하면 인물들이 그런 대사를 하게 하자는 주의예요. 그래야 보는 사람도 쾌감이 있고 보면서 딴생각하지 않게 되고요. 염미정과 구씨는 딱 골조만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 말맛이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인물들은 수다를 떨게 하는 거죠.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해.”(<나의 해방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