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너를 닮은 사람’ 유보라 작가, “시청자들은 사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같다”
2023-03-13
글 :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사진 :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사진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 작업 공간이 근사해요. 술과 향초가 많네요.

=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냄새가 나는지에 따라 공간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많이 가져다 놨어요. 술 냄새를 빼는 정화용이기도 하고. (웃음)

- 위스키 병이 쌓여 있어요. 글 쓰는 데 좋은 파트너인가요.

= 글렌모렌지 시그넷에 푹 빠져 있는데요. 초콜릿 향이 나서 안주 없이 훌훌 마시기 좋아요. 제가 의지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때려치우고 술이나 한잔해’, ‘차라리 자고 다음날 리셋해서 다시 생각해’ 싶을 때 마시곤 하죠.

- 포스트잇에 쓴 메모가 어마어마하게 붙어 있습니다.

= “주저앉았지만 아직은 링 위다.” 최근 본 미국 드라마 <털사 킹>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70대 마피아를 연기하며 한 대사죠. 전 늘 확신 없이 글을 쓰고 다음 걸 또 쓸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인데, 그 장면이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인데 제 오랜 신념이에요. 아주 예전부터 써놨던 메모인데 요즘 더 와닿아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허무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겠다고 믿고 싶어져서요.

- 서재에 좋은 책이 많더군요.

= 제 자료실이죠. 책을 공들여 선별해서 사요. 최근엔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좋아하는 소설은 정지아 작가의 <검은 방>이에요. 노모가 딸의 방을 바라보며 사념을 풀어놓는데, 이런 게 정말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17>이나 <덩케르크> 같은 영화를 보면, 서사가 없더라도 ‘저게 영화지’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검은 방>도 그런 소설이에요.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데 다 읽었을 때 묵직한 울림이 오죠.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는 77살의 작가가 다시 글을 쓰는 의지를 풀어낸 책인데요.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던 작가가 무기력을 딛고 다시 쓰기 시작하는 이야기예요. 저도 ‘고작 나 따위가 안 쓸 순 없지, 오만하지 말고 정신 차리자’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습니다.

- 고현정과 신현빈이 열연한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을 재미있게 봤어요. 복수란 참 강력한 모티브예요. 최근 <더 글로리> 열풍도 그렇고, 사람들은 복수 이야기를 참 좋아하죠.

= <모범택시2>도 인기잖아요. 현실에서 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벌받지 않는 사회라 사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같아요. 그처럼 시원한 이야기가 없기도 하고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보다는 드라마에서 그런 갈망을 충족하는 편이 낫죠. 사실 그런 면에서 저는 <너를 닮은 사람>이 어떤 면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복수 이야기가 ‘사이다’와 카타르시스를 주려면 주인공에게 온전히 이입되고 복수의 대상이 파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데, 저는 해원에게 온전히 이입할 수도 없고 희주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이야기는 단순한 게 최고인데 욕심이 앞서 그러질 못했죠.

<너를 닮은 사람> 사진제공 JTBC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감정을 파고들어

- 저는 한 여자가 자신을 닮은 듯 다른 여자에게 품은 호기심과 선망, 질투심과 애증이 입체적으로 그려져서 좋았어요. 여자와 여자가 맞서는 와중에 사이에 낀 남자는 욕망의 대상이자 예쁜 들러리처럼 보이죠.

= 원작 소설에서도 그 부분이 정말 매력적이어서 드라마화를 결심했어요. 두 여자의 관계를 더 밀도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미련이 남네요. ‘바람피웠으면 남자를 잡아야지, 왜 여자를 잡아’ 같은 시청자 의견도 있었는데 저는 여자들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어요.

-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나의 시작은 여기, 아니야, 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 너다.” 희주의 내레이션과 함께 카메라는 남자를 비추다 해원에게로 향하죠. 그 의도는 선명하게 보였어요.

= 둘은 서로에게 분신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해원도 남자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가장 믿었던 언니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던 거죠. 단순히 바람피워서 복수하겠다는 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언니기에 그냥 말해줬으면 보내줬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해원이 깊이 상처받은 거예요.

- 젊은 신인 김화진 작가의 소설 <나주에 대하여>를 보면, 자기 남자 친구보다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가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여자가 나오거든요.

= 진짜 그렇지 않아요? 내 남자가 누구랑 사귀었는지 사귈 건지 되게 궁금하고 저 여자는 어땠을까, 저 여자는 왜 좋아했을까 되게 궁금하지 않아요? (웃음)

- 여자들은 여자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미워하기도 하고요. (웃음)

= 그런 이야기가 늘 우리를 사로잡죠. <너를 닮은 사람> 원작인 정소현 작가의 소설을 보면, 여자주인공이 젊은 여자를 보면서 자신의 젊을 때와 닮았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빛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죠. 그 감정을 파고들고 싶었어요.

- 작가님도 <너를 닮은 사람>이나 <비밀>의 주인공처럼 누군가를 애증해본 적 있나요.

= 저라면 지쳐서 끝내죠.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안돼요. 저를 닮은 인물이라면 허무주의에 빠져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이나 마시는, 영화 <어나더 라운드> 같은 이야기가 최선이겠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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