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너를 닮은 사람’ 유보라 작가, "다음 작품은 인구절벽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2023-03-13
글 :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사진 :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눈길> 사진제공 KBS

이야기 전할 사람 없어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

- 장편 데뷔 전엔 단막극 장인이었죠. <드라마 스페셜-연우의 여름>은 명작이에요.<드라마 스페셜> 중 <저어새, 날아가다> <태권, 도를 아십니까> <상권이> <청춘>은 여러 계층의 사회문제를 다뤘어요.

= <청춘>은 원래 제목이 <18세>였는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당시 희생자 대부분이 17~18살이니 제목을 바꾸라고 권고가 내려와서 바꾼 거예요. 무섭죠? (웃음) 단막극은 이야기를 좀더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애정이 많아요. 작가들도 감독들도 신인이 많아서 만듦새는 다소 서툴지라도 진정성은 굉장하죠. OTT의 시대라지만, 요즘에도 방송사 단막극 공모전은 계속해요.

- 극본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 모든 협업의 기본은 대본이라는 책이에요. 굉장히 책임감이 무겁죠. 모든 사람을 충족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이해는 가는 이야기를 써야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휘둘리지 말아야죠. 결국 극본의 힘은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를 잊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쓰려 했던 걸 심지 있게 흔들리지 않고 써내는 것. 시대가 변해도 극본의 힘은 예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있을 거예요.

-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쓰게 하나요.

= 계약이요. 나에게 계약금을 지급한 제작사가 손해 보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제가 이야기를 쓰게 하는 힘이죠. 그게 아니었으면 제가 어디 가서 뭘 하고 있겠어요? (웃음) ‘저 사람들 다 네 대본만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이 저를 현실적으로 달려가게 해요.

-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요.

= 이 장면을 쓰고 싶다. 이 장면에 나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요. 다큐멘터리와 <인간극장>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 만들고 싶은 장면이 불쑥 떠오르죠.

- 오늘 인터뷰에 내내 함께한 고양이, 보리도 영감을 주나요.

= 그럼요. 이렇게 있을 때 멍하니 있다가 어느 순간 보리의 숨 쉬는 소리가 들릴 때, 어떤 생명체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따듯하게 느껴져요. 또 내가 열심히 써야지 얘를 먹여살릴 수 있다는 책임감이 확실히 들어요. 동력이 되죠. (웃음)

-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 제가 만나는 PD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일제강점기 한 시골에 사는 소녀가 만주에 있는 오빠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요. 그 과정에서 유명한, 혹은 이름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순진하고 겁 많던 소녀가 몇년에 걸쳐 만주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강건한 투사가 돼 있는 거예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남성만큼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 이유를 캐보니, 남성 독립운동가에겐 아내와 자손이 있으니 이분들의 이야기가 계속 알려지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대개 남편과 자손이 없어서 잊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들을 조명하고 싶었어요.

사진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을 믿고 싶다

- 지금 쓰는 이야기는 어떤 건가요.

= 인구절벽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지금 한국 출생률이 0.78이잖아요. 아이를 낳으라고는 하면서, 여전히 ‘노키즈존’이 대부분이고 ‘맘충’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시대죠. ‘애 낳는 게 벼슬이야?’라고들 하는데, 이 정도면 벼슬이 돼야 해요. (웃음) 벼슬이 될 정도로 지원해주든가, 적어도 아이를 낳는 게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해줘야죠. 이런 현상을 다룬 드라마가 될 거예요. 올해 안에 촬영 들어가는 게 목표입니다.

-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 길을 가다가 휴지를 줍는 사람, 쓰러진 입간판을 세워놓고 가는 사람, 고양이가 있으면 ‘안녕’ 하고 가는 사람, 유기견을 보고 사람들이 ‘아이고 어떡해’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저는 그런 작은 게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나요.

= 치열한 이야기. 저는 치열하게 살고 치열하게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런 치열함엔 사회의식도 녹아나게 마련이죠. <더 글로리>도 그래서 재미있다고 생각하고요. 얼마 전 미국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를 봤는데 인생 드라마였어요. 아주 괴팍하고 불친절한 노년의 여성이 더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던지죠. 우리는 너무 쉽게 이야기해요. ‘자살각’ ‘늙으면 죽는 거지’ . 그런데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 무엇을 믿나요.

= 저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을 믿고 싶어요. 요샌 누가 잘해주면 사기 치는 거니 조심하라고 의심부터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작은 선의를 믿고 싶어요. ‘내가 너한테 돈 버는 법 알려 줄게’ 이런 선의 말고. (웃음) 여전히 제 안엔 의심이 가득하지만, 그런 작은 선의가 모여 사회가 좋아질 거라 믿고 싶네요.

사진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에필로그

8년 만의 재회였다. <씨네21>에서 삼일절 특집극 <눈길>로 찬사를 받은 유보라 작가를 만나 인터뷰한 지 어느덧 8년, 그는 고현정, 신현빈 주연의 <너를 닮은 사람>과 이준호, 원진아 주연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 두편의 상업 드라마를 써낸 원숙한 작가가 돼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는 완연한 어른이었다. 자신의 글에는 엄격하고 겸손하지만,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믿는 것을 즉문즉답으로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사람. 위스키와 향초와 책과 메모가 가득하고 고양이가 고고하게 돌아다니다 골골 소리내어 우는, 아름다운 작업실에 초대받은 기분은 어쩐지 수줍었다. 이 대화를 읽은 독자도 그런 마음을 함께 느꼈기를 바란다. 유보라 작가가 꼭 쓰고 말리라 다짐한다는, 일제강점기의 한 소녀가 만주로 떠나 어엿한 독립운동가가 돼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응원하며 기다리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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