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웹툰도 드라마도 주인공이 극적인 사건을 겪고 자극적인 장면이 나와야 사람들이 보니까, 다소 의식적으로 그런 장면을 넣었다고 김보통은 말했다. “지금은 저를 알려야 하고 대중적으로 홍보해야 하니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극적인 사건이 없어도 사람들의 삶이 확연히 달라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그가 놀이에서 시작해 만화와 수필, 칼럼, 드라마, 연출까지 나아갔던 배경엔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쓰는 습관’이 있다. 부담감을 갖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쓰는 것이다.
김보통의 15분을 빼앗은 작품들
눈을 뜬다. 시야에 하늘을 가리는 우거진 나뭇잎이 보인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숲 한가운데 누워 있다. 몸에는 상처가 있다. 숲을 헤치고 한참을 달려 나와 모래사장에 이른다. 남자의 눈에 불타는 비행기 잔재와 다친 사람들이 들어온다.
미국 시리즈 드라마 <로스트>의 첫 장면이다. 김보통은 이 드라마의 도입부가 가장 완벽하다고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궁금해지는 거잖아요. 이 충격을 잊지 않고 싶어서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봐요. 어제도 다시 봤어요.”
김보통은 모든 OTT를 구독한다. 스포츠나 로맨스, 사극 등을 제외하고 새로 나오는 영화나 시리즈는 대부분 본다. 다만 15분만 본다. 채널을 돌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15분. 그는 한 사람의 시청자 입장에서 보고 재미가 없으면 끈다. 초반 15분을 넘어 계속 보는 경우는 많지 않고, 끝까지 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김보통은 말한다. 그런 그가 최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시리즈가 있다. <슬로 호시스>다. 시리즈 첩보 드라마로, 영국 보안국(MI5) 요원들의 이야기다.
김보통이 생각하는 가장 짜임새 있고 스토리가 탄탄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는 작품이 아닌 봉준호 감독을 꼽았다. “보통은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봉준호 감독 영화엔 그런 장면이 없어요. <기생충>을 보고 나서도 그냥 졌다(고 생각했어요), 보조 작가라도 하는 게 소원이에요. 옆에서 배우고 싶어요.”
에필로그
“한번 읽어보시기를 꼭 권해드려요.” 김보통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며 권한 책은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였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그냥 고양이가 주인을 관찰하는 이야기다. 그는 이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책이) 두꺼워서 아마 보기 싫으실 거예요. (웃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100년도 더 전에 출판된 책이다. 600쪽이 조금 넘는다. ‘기사 마감 전에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서점으로 향했다. 토요일 아침, 호기롭게 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첫 문장이 흥미롭다. 중학교 영어 선생의 집에서 살게 된 고양이가 인간들을 관찰한다. 고양이가 보는 선생은 서재에 틀어박혀 낮잠을 자고 책을 펼치면 이내 잠드는 그런 사람이다.
100쪽 정도 읽었을까. 단조롭다는 생각이 몰려오며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극적 사건’은 없었다. 고양이가 몰래 떡을 먹다 이빨에 떡이 단단히 박힌 순간이 그나마 긴장감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맑은 정신으로 오후에 다시 읽기를 시도하다가, 이내 또 잠이 들었다. 결국 마감 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완독은 실패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까 정말 궁금해하면서 펼친 그 (책의) 마지막 한장이 너무 만족스러웠어요.” 김보통의 말이 떠올랐다. 본문을 뛰어넘고 마지막 장을 펼칠까 한참을 고민했다. 이리저리 본문만 뒤적거리다 문득 옮긴이의 말에 눈길이 갔다. “진지하게 읽지 마시라. 그냥 힘 빼고 즐기시라. 이러저러한 걸 풍자한 것 아니겠나, 하며 의미 맞추기에 골머리를 앓다가는 고양이한테도 무시당할 터.” 극적인 사건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마지막 장은 아껴두었다. 천천히 읽어나가며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김보통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