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의 <인간수업>으로 일약 주목받은 뒤 2년 만에 신작 <글리치>가 나왔습니다. 갑자기 주목받고 빠르게 다음 작업을 선보여야 하는 것에 두려움은 없었나요.
= 사실 <인간수업>을 처음 어렴풋이 구상한 건 고등학생 때였거든요. 누가 봐도 얌전한 모범생인데 뒤에선 이상한 짓을 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조 작가 시절에 10대 성매매 포주의 이야기로 구체화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이디어를 혼자 품고 있는 시간이 긴 신인 작가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의심이나 두려움은 크게 없었죠. 그러다 각본이 넷플릭스에 안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산업의 관점이 담긴 피드백들을 듣게 됐어요. 저는 그때 비로소 작가가 윤리적으로 예민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들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배운 것 같아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글리치> 땐 마감이 자꾸만 늦어져 주변 분들을 꽤나 고생시켰습니다. 갑자기 제 글에 대한 의심이 심해진 거죠. 잘 쓰다가도 다음날 보면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가로막혀서 쉽게 앞으로 나가질 못했어요.
- 마감 앞에서 자기 의심이 짙어질 땐 어떻게 하나요.
=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잠깐 덮어둘 수 있지만 상황이 안될 때는 마음이 어떻든 무시하고 일단 써내는 힘이 필요하단 사실을 절감했죠.
- <인간수업>은 성매매에 노출된 10대를, <글리치>는 사이비 종교와 UFO에 홀린 청년을 다룹니다. 누군가는 불편하거나 마니악하다고 느낄 수 있는 소재인데 대중의 호응을 예상했나요.
= 그런 예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인간수업>은 특히 기대가 적었어요. 그랬다면 오히려 일찌감치 작품을 완성할 동력을 잃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다만 시청자와 소통의 선을 정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좀더 선명히 다듬어야 할 부분과 절제하고 깎아낼 것은 가려내는.
- 두려울수록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 앞선 두 작품을 해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더 뼈저리게 느껴요. <인간수업> 후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어떻게 해야 참신한 아이템으로 대중과 산업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혼란이 깊어진 시기였죠. <글리치>의 출발을 앞두고 흔들릴 때 결국 중심을 잡게 해준 것은 “작가인 나 자신이 신기해하며 재밌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맞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이었습니다.
- 플랫폼이 다변화되면서 그야말로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우선 눈에 띄는 기획이 중요해진 시장에서 작가들의 고민도 깊어질 것 같아요.
= 제가 OTT 드라마로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획 단계에서부터 소재적으로 선명하고 참신한, 어떤 의미로는 자극적인 아이템을 찾는 분위기가 확실히 느껴집니다. 작가로서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고, 한편으론 경계하고 있어요. 소재의 신선함을 위해 물론 노력합니다. 하지만 결국 시청자가 드라마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서사의 힘, 그 속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감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냉정하게 보자면 더이상 새로운 것이 있는지 자문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많이 나왔고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달리 말하면 소재를 보는 관점이 중요해진 거죠. 객체 자체가 아닌 그것을 보는 관점에 집중해 새로움을 찾으려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