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전업 작가… “드라마 <미생> 보면 신기해요”
“거의 첫 영화라 할 수 있는 <동갑내기 과외하기>, 거의 첫 드라마라 할 수 있는 <연애시대>가 성공한 뒤 계속 마이너한 작품이 나왔어요. 만약 거꾸로 (초창기에 마이너한 작품부터) 썼다면 저는 두 번째 작품을 못했을 거예요. <연애시대>의 후광이 있었기에 시청률이 안 나와도 계속 작품을 의뢰받았던 거니까요.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1972년생 작가 박연선은 평생 글 쓰는 직업 말곤 해본 적이 없다. 대학교 4학년 때 예능 작가로 시작했는데, 곧 흥미를 잃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영화 <태양은 없다> <비트>의 시나리오를 쓴 심산 작가 수업을 들었고, 2002년 ‘MBC 베스트극장’에 단막극 시나리오를 냈는데 당선됐다. 권상우, 김하늘 주연의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각본을 썼는데 대흥행했다. 30살 전후에 불과한 나이였다. 드라마·영화·소설을 넘나들면서 23년 동안 작가로만 살아왔다.
“다른 일은 한번도 안 해본 셈이죠. 그래서 지금도 회사원들을 그린 <미생> 이런 드라마를 보면 되게 신기해요. 매일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저한테는 약간 그런 게 자료 조사의 영역이에요.”
2월28일 방문한 박연선 작가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작업실 한구석에는 미용 관련 책이 쌓여 있었다. 2021년 방영 예정이었으나 출연배우 관련 논란이 불거지면서 방영되지 못한 드라마 <날아올라라 나비>를 쓸 때 보던 책들이다.
“저는 자료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드라마 <날아올라라 나비> 속 배경인) 미용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곳이잖아요. 다들 아는 얘기기 때문에 자료 조사가 더 많이 필요했어요. 머리카락, 열, 고데기의 역사 이런 것을 찾아봤죠. 지금 여러 사정으로 (방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더이상 노력하기 싫어’라는 마음이 들기도 해서, 노력하기 싫을 땐 노력하지 않으려고요.”
<검사내전>에 ‘크리에이터’(작가들과 회의하면서 의견을 종합하고 흐름·캐릭터·형식 등을 코치하는 역할)로 참여한 걸 제외하면, 의도치 않게 가장 최근작이 <청춘시대>가 됐다. ‘청춘시대’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외모, 성격, 전공, 남자 취향, 연애 스타일까지 모두 다른 5명의 여대생이 셰어하우스에 모여 살며 벌어지는 유쾌하고 발랄한 청춘 동거 드라마’란 소개가 나온다. 꼭 맞는 느낌은 아니다. ‘유쾌하다’기엔 아프고, ‘발랄하다’기엔 현실적이다. 연애를 다루면서 삼각관계나 신데렐라 스토리를 가져오지 않았고, 미스터리를 다루면서 악인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잔잔한 유머’로 가득 차 있어도 ‘아픔과 치유’의 드라마로 기억되는 이유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위에서 갈등하는 내면
- <청춘시대> 드라마를 보고 나니 등장인물 중 강이나가 가슴에 남았어요. (극중 강이나는 강물에 빠졌다가 살아난 경험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강물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과 서로 가방을 붙잡으려 사투를 벌였다. 중년 남성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의미 없이 살아간다.)
= 그 문제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스에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는 말이 있대요. 강물에 빠진 두 사람이 같이 판자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붙어 있으니까 판자가 가라앉아서 둘 다 죽게 생긴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밀어버리고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면, 재판정에서 이 사람은 무죄인가 아닌가.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때 다른 사람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의 내적 갈등은 얼마나 클까. 그리고 세월호 사건을 보고 나서 이런 캐릭터가 나온 거죠. 이 사람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까 상상해보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 것 같지 않은 거예요. 자기의 조심, 계획과는 아무 상관 없이 내가 오늘 길 가다가도 죽을 수 있는데 적금을 붓고 입시를 보기 위해 공부하고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사는 사람을 봤을 때의 동경과 질투가 있지 않을까, 이런 관계성을 만들어간 거죠.
- 얼핏 보면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드라마 같은데 큰 맥락에서 보면 추리, 스릴러 같아요. 전략적으로 짠 건가요. (등장인물들에겐 서서히 밝혀지는 각자의 트라우마가 있고, 셰어하우스 신발장에 귀신이 산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 제가 그런 이야길 좋아해서일 거예요. 책도 거의 미스터리, 스릴러 이쪽으로 편향해서 읽어요. 저는 역사물도 그렇고 모든 책이 미스터리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일상물도 사소한 미스터리가 될 수 있어요. 연애물도 사실은 ‘이 사람이 저 사람과 나중에 결혼할까’ ‘왜 좋아할까’ 궁금증이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도 있어요. 소소한 일상물을 다루는데 하나로 꿰지는 뭔가가 없다면 그냥 낱낱이 흩어진 조각인 거잖아요. 그걸 꿰는 것을 미스터리로 삼죠. 주인공이 여럿이잖아요. 귀신은 도대체 누가 보나, 각자의 귀신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