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없는 산골에서 듣던 할머니의 이야기
- 그렇게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나요.
= 왜 가난한 집 아이들은 자기가 보고 자라는 게 얼마 없어서 꿈을 꾸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저는 작가가 되고 싶긴 했는데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주변 직업인이 농부와 선생님밖에 없었으니까. 어느 정도 시골이었냐면, 제가 우리 동네에서 대학에 간 첫 여자예요. 아버지가 굉장히 가난한 농부예요. 아버지가 대단한 공정함 같은 게 있었어요. 6남매인데 오빠들이 대학을 갔어요. ‘오빠는 갔는데 왜 나는 안 보내지’ 하니까 아빠가 잠깐 고민하다가 ‘그렇지, 나중에 형평성 문제가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저까지 보내주신 거예요.
- 글을 잘 쓰려면 흔히 다독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어릴 때 그랬나요.
= 그때는 제가 책을 좋아하는지도 몰랐어요. 시골 학교 도서관이라는 데가 책도 많지 않았고 책을 읽으라고 빌려주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학기가 돼서 오빠들이 책을 갖고 오면 오빠 네명의 국어책은 다 읽었던 것 같아요. 책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할머니가 ‘저의 뭔가를 다 만들어준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 옛날얘기를 무척 많이 해주셨고, 해달라고 졸랐고,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어요. ‘지네가 된 아가씨’ 이런 옛날얘기도 있지만, 우리 가족의 서사 ‘우리 증조할머니가 시집갔는데 신랑이 아파서 3년 만에 죽고’ 이런 서사를 옛날얘기처럼 해주셨어요. 약간 (작가가 될) 성향도 있었던 거 같아요. 대학생 때 서울로 오려고 시골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 할머니하고 손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있었어요. 할머니가 칠성사이다 큰 병이 든 보따리를 들고 어린 손녀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을 봤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뭔가 막 상상이 됐어요. 잊히지도 않았고.
연쇄살인범보다 그 아들의 이야기에 끌린다
- 소설, 드라마, 영화를 다 썼어요. 장면이 잘 그려지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나요.
= 제가 드라마 작가 지망생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 장면을 보고 쓴다고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장면으로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해요. 창밖을 보면 대략 열두명이 있는데 누구는 얘기하고, 누구는 저기로 가고, 노란 옷 아저씨가… 이렇게 쭉 쓰는 게 아니라 ‘평일 오후 2시의 탄천면이다. 봄의 날씨다’ 그래야 대체로 미술팀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잖아요. 꼭 말해야 할 장면만 말하면서, 당신이 전하고 싶은 그걸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 작법서도 많이 보셨나요. 이야기를 한번에 써내려가는 편인지, 많이 퇴고하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 옛날에 영향받은 건 로버트 맥키의 책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였어요. 스티븐 킹의 책도 읽었는데, 사실 작법서를 여러 권 읽는 것보다 하나를 정해 여러 번 읽는 게 낫지 않나란 생각도 했어요. 작가들이 쓴 자서전이나 글쓰기 방법론을 가끔 읽을 때가 있는데, 왜 그러냐면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도 글쓰기를 힘들어하는군’이라는 위안을 받기 위해서예요. 시리즈물을 쓸 때 1~4회는 정말 수없이 퇴고해요. 시리즈물은 약간 조각과 같다고 생각해요. 전체적인 걸 생각하고 조금 팠다가 ‘이렇게 봤더니 좀 틀렸네’ 하면서 다시 이쪽을 더 파고, 또 돌아와 이쪽을 파고. 절대 한번에 되지 않고 끊임없이 조각해내야만 나올 수 있는 거예요.
- 작가님의 지금 관심사는 뭔가요.
= 예전에는 극단적인 사람, 연쇄살인범, 이런 이야기에 끌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연쇄살인범보다 ‘연쇄살인범의 아들’에게 더 끌려요. <스톤 다이어리>라는 책이 있어요. 어떤 여자의 출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슨 일을 했고 엄마 아빠가 어떻게 만나 아기가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어서 아빠 손에 크다가…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퀴리 부인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닌 옆집 아줌마, 할머니의 일대기를 마치 위대한 사람 자서전 쓰듯 쭉 따라간 이야기, 그런 걸 한번 이제는 써보고 싶어요.
에필로그
박연선 작가의 작업실에는 영화 <레옹> 속 마틸다, 조깅하는 여자, 쭈그려 앉은 할머니 등 인물들을 스케치한 흰 종이가 쌓여 있었다. 박 작가는 “글 쓰기 싫을 때 30분 정도 끼적인 그림들”이라고 했다. 표정도, 동작도, 주름도 다양했다.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고, 그 모습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작업실은 무척 깔끔했다. 알아보기 힘든 복잡한 글이 쓰인 화이트보드, 큰 테이블, 노트북과 책상, 공책과 필기도구가 전부였다.
“하루 루틴을 정해요. 여기로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 마시고 밥 먹으면 대략 오후 1시쯤 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오후 6시까지 일해요. 주 5일 정도 하는 거 같아요. 업무 시간이 끝나면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산책하거나 자기 전 문득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하루가 끝나도 머릿속으로 구상은 저절로 하게 돼 끊을 수 없는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경력이 많아지면 그게 좀 차단돼 좋더라고요. 약간 좋기도 하면서 이제 나는 ‘직업인으로서의 작가’가 됐나보다, 뭔가 물들었다는 느낌? 더이상은 글 쓰는 일이 특별하지 않게 됐다는 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