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처럼 연습해야 글쓰기 능력 유지
아이를 키우는 동안 5년의 공백기도 있었다. “그땐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 같았어요. 그러다가 공모전이 열렸는데 지인이 내보라고 엄청 채근하더라고요. 예전에 쓴 작품 <너테, 얼음의 다락>을 급하게 찾아서 냈는데 당선됐죠.”
힘을 얻어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작법을 다 잊은 듯 낯설었다. 다행히 오펜에서 단막극 쓰는 단계부터 차근차근 도움을 줬다. 그는 잊었던 것을 차츰 기억해냈다. <슈룹>도 오펜에서 기획한 작품이다.글쓰기 훈련도 다시 시작했다. 극작가 지망생인 친언니와 비공개 인터넷 공간을 열어 매일 글을 올렸다. 분량은 자유주제로 한 사람당 A4용지 2장 이상. 한달이면 40장이 넘는다. “작가도 피겨 선수처럼 연습을 계속하지 않으면 (기량이) 나오지 않아요. 과제를 하려고 억지로 이것저것 찾다보면 아이디어가 새로 나오기도 하죠.”
그는 요새도 드라마 소재를 찾으러 대중교통이나 찜질방 등을 자주 찾는다. “전철을 타서 칸을 옮겨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요, 찜질방 가서 삼삼오오 음료수 마시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해요. <슈룹>의 태소용(김가은)처럼 귀엽고 통통 튀는 인물을 만들 때는 카페에 가서 사람들 화법을 듣기도 합니다. 제 지인과 상상력은 한정돼 있으니까요.”
언제나 이야기가 막힘없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갈 땐 한없이 가지만, 막힐 땐 한없이 막혀요.” 그럴 땐 잠깐 다른 이야기를 손에 쥔다. 그는 평소에도 작품을 동시에 서너편씩 굴리며 쓴다. “혹시 그중에 하나만 살아남더라도 나머지 작품에서 가져올 게 있거든요.”
<슈룹>에서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아들 계성대군(유선호)을 화령이 받아들이는 장면도 이렇게 탄생했다. 자신을 내칠까 두려워하는 아들에게 중전은 도리어 여성으로 분장한 아들의 초상화와 비녀를 건넨다. “언제든 네 진짜 모습이 보고 싶거든 그림을 펼쳐서 보거라. 이 비녀도 딸이 생기면 주려 했던 것인데 너에게 주마.”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 사전>에서 건진 ‘슈룹’
‘성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자녀’는 사극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소재다. 박 작가는 <슈룹>을 쓰며 다른 현대극도 같이 쓰고 있었는데, 그 극본에서 계성대군 일화를 가져왔다. “사극과 현대극이 언뜻 보면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둘이 만나면 더 독특해질 수 있어요.”
박 작가는 특히 시대물에 애정이 많다.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내는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시대 얘기는 뉴스와 다큐에도 나오지만 시대물은 그 시대밖에 못 담는 얘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 상상만 해본 것을 구현해낸다는 매력이 있어요. 특히 사극은 아름다운 우리 한복과 문화재의 멋을 소개하는 재미도 있고요.”
<슈룹>이 얼개를 갖췄을 무렵부턴 동네 도서관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극에 필요한 소재와 소품 등을 건지기 위해서다. <슈룹>에는 구멍이 뚫린 술잔인 ‘계영배’(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가 나온다. 술을 7할 이상 따르면 구멍으로 술이 새어나간다. 중전 화령이 심소군을 위로하며 계영배를 건넨다. “국모인 나도 구멍이 숭숭 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한다면 꽉 채우지 않아도 썩 잘 사는 것이다.” 이런 소재는 책에서 발견했다. “주로 그림과 사진 있는 책 위주로 봐요. 글은 맥락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는데 그림은 금방 이해되니까요. 계영배도 역사책을 보다가 찾았는데 모양도 예쁘고 기능도 특이해서 적어뒀죠.”
평소 옛말을 찾아보는 취미도 도움이 됐다. 드라마 제목 ‘슈룹’은 우산이라는 순우리말이다. 그는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 사전> 등을 뒤적이며 특이하고 예쁜 말을 수집하다가 그 단어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사전조사도 실제 드라마 제작 땐 수정이 불가피하다. <슈룹>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구상한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저는 신인이라 아직 무엇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감이 부족해서 대안을 다 써봅니다. <슈룹> 정식 대본에 안 들어간 대본만 2천장이 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