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정서경 작가가 ‘아가씨’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썼다는 ‘작은 아씨들’ 장면
2023-03-17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 얼마 전 열린 디렉터스컷 어워즈에서도 대본 집필 때문에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대신 하셨잖아요. 결국 마감을 정확히 지켰다고 들었습니다.

= (너스레를 떨며) 요새 제가 마감을 잘 지키는 작가라는 명성이 생겼어요. (웃음) 최근엔 4주에 한회 대본을 완성한다는 생각으로 일하거든요. 1~2주차에 지난 회차 대본을 수정하고 다음 회차 시놉시스를 쓰고, 3~4주차에 대본 작업을 해요. 그렇게 두달 동안 두회차 대본을 썼습니다.

- 지난해 <작은 아씨들>을 마치고 짧은 휴식기를 갖다가 새 작품에 들어간 건가요.

= 바로 들어갔어요. 저는 평소에도 많이 쉬는 편이니까. 시나리오 쓰는 시간 외에는 그냥 2~3시간씩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거든요. 중간중간 프로모션 때문에 외부 활동을 했고요.

- 쉴 때 푹 쉬는 게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 같아요.

= 저는 차를 끓일 때도 ‘내가 이 차를 끓였다니! 믿을 수가 없어!’라고 감탄해요. (웃음) 제가 제 자신에게 굉장히 관대하다는 것을 감안하고 말하자면, 그날그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쓰려고 해요. 일뿐만 아니라 엄마로서도 그렇습니다. 마감이 급할 때는 일주일 내내 작업실에 오지만, 한달 중 2주 정도는 아이들과 주말을 보내요. 일 생각을 털고 TV도 영화도 보지 않고 수다만 떨죠. 그러다 작업실에 오면 20분 정도 워킹패드 위를 걷고 씻으면서 집안일을 지우고 대본을 쓸 수 있는 머리를 만들어요. 쓰기 이전의 삶과 쓰기의 삶 사이를 구분하기 위해 하는 빗질 같은 거예요.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와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쓰는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는 다르지 않을까요. 저는 여러 가지 비율이 잘 맞아야 균형감이 생긴다고 믿는 쪽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 일에 집중이 안된다고 생각할 땐 어떻게 대처하는 편입니까. 하루에 꼭 써야 할 분량을 정해두나요.

= 제가 외부에서 받는 압박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짐을 추가로 얹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시나리오 쓰는 일이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순간이 많고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하고 싶은 대로 둬요. 집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게 며칠씩 걸릴 때도 있거든요. 초조해하지 않고 문 밖에서 계속 배회해요. 그러다가 성공적으로 문을 열고 길을 찾으면 그때부터는 더 많이 쓸 수 있어요. 글이 안 써질 때는 제가 못 쓰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왜 못 쓰고 있는지, 이 부분이 왜 어려운지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려고 해요.

- 지난해 종영한 <작은 아씨들> 애기를 해볼까요. 드라마 자체가 70~80년대 한국 현대사 다이제스트라고도 불렸죠. 부동산 투기, 사학 비리 등 극중 등장하는 사건을 뽑은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 아기 낳고 도서관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책만 봤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한국 근현대사에 심취했어요. 저는 1975년생이고, 80~90년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지켜봤어요. 당시 어떤 사람들은 부를 쌓고 어떤 사람은 기회조차 받지 못했어요. 부동산 때문이죠. 당시 부자가 되는 플롯은 무척 전형적이었습니다. 그런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봤어요.

- <작은 아씨들>의 정란회는 밑에 있는 사람을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베트남전 영웅 원기선 장군이 아닌 원상아(엄지원)였습니다. 전자는 거의 죽어가는 모습만 등장하죠.

=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전쟁을 거치고 나면 다 비슷하게 시작한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똑같이 가난했지만 어떤 사람은 전쟁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해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를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계속 가난해요. 점점 격차가 생기고 세대를 거쳐 부가 세습되고 굴절되면서 달라진 풍경들이 있어요. 저에게 6·25전쟁은 너무 옛날이었고, 제가 다룰 수 있는 가장 먼 사건은 베트남전쟁이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은 두 세대가 복잡하게 걸쳐 있는 이야기예요. 부모 세대의 생존 패턴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식에게 물려져요. 그렇게 남아 있는 유령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면 원상아 같은 인물이 되고, 오인주(김고은) 자매는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한 부모가 낳은 아이들이죠.

- 마지막회에서 인혜(박지후)와 효린(전채은)이 손을 잡고 배에 오르는 모습에서 <아가씨>의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할 수 있는지 자문하던 두 사람이 결국 가족의 곁을 떠나죠.

= <아가씨>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똑같이 쓴 장면이에요. (웃음) 결정적인 시기, 나는 너밖에 없고 너도 나밖에 없는 관계로 엮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인혜와 효린은 새로운 세대죠. 부모가 그들을 키우고 언니들이 희생했지만 자기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돈의 사이클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순수한 관점으로 돈을 다시 분배해야 이전의 유산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요.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미래는 아이들이고, 내가 아닌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그게 곧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고. 사실 미래를 위해 자식을 낳은 거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는 이미 반복적으로 다채롭게 나왔어요. 그에 반해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단순한 선악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죠. <마더>를 썼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상한 엄마와 그의 딸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 <마더>의 수진(이보영)은 정서경 월드에 나오는 다른 여자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유괴를 선택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요.

=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한 여자 중 하나인데, 이보영 배우와 김철규 감독님이 대본을 그대로 두면서도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잘 만들어줬어요. 셰익스피어나 체호프 희곡을 표현할 때 나타나는 톤처럼 한국 드라마의 결이 있잖아요. 이보영 배우는 한국 드라마에 존재하는 양식을 가장 긍정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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