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의 복수극은 문동은(송혜교)이 아닌 박연진(임지연)으로 완성된다. 박연진은 문동은이 여러 번의 기회를 주고도 끝내 복수를 수행하고 싶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박연진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폭주하면 할수록 복수에 대한 관객의 쾌감은 급증한다. 따라서 <더 글로리>의 성공 여부는 박연진의 극 중 점유도와 내밀한 상관관계를 맺는다. 실제로 <더 글로리>의 흥행 이후 배우 임지연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지고, 틱톡, 릴스 등 숏폼 SNS에서는 많은 크리에이터가 그를 모사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무수한 찬사로 가득한 축포 속에서 유독 눈에 밟히는 단어 하나가 보였다. 바로 ‘재발견’이다.
오해나 선입견 속에 갇혀 있던 무언가의 가치를 다시금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이 재발견의 보편적 의미라면 응당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배우 임지연이 이제야 재발견되었다고 환호하기엔 어색한 면이 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고 성실하게 새로운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간 대중과 언론이 그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은 까닭에 그의 성장과 변화를 다소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라는 중심축을 세우다
2014년 관객에게 처음 자신을 알린 <인간중독>에서 임지연은 서로 다른 이면을 동시에 펼쳐냈다. 새장이 가득한 아름다운 온실 속에서 가흔으로 첫 등장을 알리며 청초하고 비밀스러운 이미지를 선보이는 동시에,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온 김진평(송승헌)에게 직접 귀걸이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과감함을 드러낸다. 단아한 용모와 달리 밀의를 품고 행동하는 가흔의 양극단의 모습은 대중에게 충분히 각인됐지만, 결과적으로 가흔은 불륜과 섹스의 서사 속에서 남성 중심적 사고가 선망하는 수동적인 여성상, 섹슈얼리즘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한계를 갖는다. 그다음해 개봉한 <간신>을 차기작으로 선보이며 배우 임지연에 대한 기대는 사뭇 일관된 평가에 머물고 말았다.
그 뒤로 2016년 SBS <상류사회> <대박>, MBC <불어라 미풍아> 등 드라마로 작업을 이어가던 임지연은 2019년 MBC <웰컴2라이프>에서 새로운 변화를 꾀한다. 주변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발차기와 과격한 욕설, 털털한 차림새와 쇼트커트 등 정의감 강한 형사 라시온을 현실적으로 체화하기 위해 이전과 다른 이미지를 구현하기 시작했고, 욕설의 발음이나 눈 질끈 감고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 등이 지금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바로 직전 작품 <불어라 미풍아>에서 평양 출신인 미풍이의 북한 사투리는 다소 헐겁고 어색하게 들렸지만 <웰컴2라이프>의 라시온의 대사에선 섬세한 목소리 변화가 느껴진다. 또한 평행 우주를 오가는 인물의 난처함과 곤란함 등을 자연스레 표현해 연기 개선에 대한 임지연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에서 카지노 칩을 몰래 훔쳐 살아가는 영미로 분한 임지연은 다소 경박스럽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이중적 모습을 통해 극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었다. 배역의 성향과 기질, 태도와 자세의 저변이 확장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임지연이 인물을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인물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타짜: 원 아이드 잭> 속 영미의 어투 중 <더 글로리>의 연진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질문에 그는 “영미는 나 자체로 임한 인물”이라며 “내가 평소 쓰는 문장, 억양, 톤을 그대로 구사하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답했다. ‘나’라는 중심축을 세우고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타짜: 원 아이드 잭>부터 최근작 <더 글로리>까지 임지연의 연기는 고유한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2022년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2에선 원작에 없던 인물 서울로 완전한 변신을 꾀하는 데 성공한다. 파트1이 강도단과 경찰의 첨예하고 팽팽한 대립을 그려냈다면, 다각도의 모략과 전투를 빠르게 전개시키기 시작한 파트2에서 임지연은 베를린(박해수)의 직속 부하이자 연인으로 날렵하고 호전적인 캐릭터를 그렸다. 특히 파트2 8화의 뒤늦은 등장에서부터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는데, 경찰에 이송되는 도쿄(전종서)를 구출하기 위해 (이제껏 본 적 없던) 험악한 표정으로 총구를 겨냥하는 모습은 또 다른 각인을 남겼다. 경찰과 긴장감 넘치는 언쟁을 벌인 끝에 도쿄에게 “반갑다. 난 서울”이라고 건넨 짧은 인사는 임지연의 절제력과 목소리, 분위기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2019년 이후 연기에 탄력을 받은 그는 갈지자로 자유롭게 작품에 출연하며 2022년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더 글로리>의 박연진이 임지연의 절정을 만들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를 통해 폭주와 광기, 끝없는 불승분노(不勝憤怒)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다만 임지연이 이제야 자신에게 걸맞은 작품을 만나 빛을 발했다는 평가에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임지연이 어느 날 뚝딱 박연진을 만들었을 리 없다. 그의 시간을 더 찬찬히 복기할 필요를 이제야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