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는 2022년 11월23일부터 2023년 6월18일까지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를 진행 중이다.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테이프 2만7천여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광주 영화인 조대영씨가 지난 20여년간 모은 결실이다. 조대영씨는 비디오 수집가이기 이전에 광주 지역의 영화 문화를 꾸준히 일궈온 영화인이다. 비디오가 가진 영화의 물성에 반한 그는 비디오산업이 쇠퇴하던 2000년 초부터 시대와 영화 유산으로서 비디오를 모으기로 결심한다. 이외에도 조대영씨의 박물관급 수집 능력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있다. 영화와 인문학에 관한 책은 물론 각종 기록물도 꾸준히 모아 개인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무언가를 모은다는 건 애정의 증거다. 영화를 사랑한 광주의 한 영화인은 그렇게 긴 세월 박물관을 자처하며 지금도 스쳐 지나가 사라질지도 모를 기록과 기억을 수집 중이다.
▼이번 기획 전시에서는 조대영씨의 소장 비디오 5만여개 중 중복되거나 파손된 작품을 제외한 2만5천개를 정리해 전시 중이다. 총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전시한 비디오들을 둘러보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가정용 비디오 시장의 흐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입구의 인포룸에서는 영화 잡지 <키노> <로드쇼> <스크린> <씨네21>을 비롯한 책자가 모여 있다. 옆에는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비디오 운동인 1980년대 광주 비디오 자료부터 지역의 시네마테크 운동 자료가 마련된 ‘비디오 꼬뮌들의 연대기’가 함께 전시 중이다.
▼만화영화 시리즈와 어린이영화를 전시한 C구역. “만화영화를 일부러 모은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굵직한 시리즈가 눈에 들어온다. 그 시절 비디오를 보고 자란 세대뿐 아니라 어린 친구들도 흥미롭게 관람해주어 신기하고 즐겁다.”
▼드라마, 액션영화, 중국영화로 정돈한 A구역과 한국영화, 일본영화, 호러영화, 서부영화, 전쟁영화 등을 모아놓은 B구역. “대성초등학교사거리에서 ‘비디오 보물섬’이라는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다. 비디오가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산업폐기물로 버려지거나 변두리 모텔로 팔려나가던 시절부터 사비를 털어 비디오를 모아 지하 창고에 저장했다. 비디오가 한 시대의 유산으로서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인식될 날이 올 거라 믿었다.”
▼관객이 비디오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비디오를 직접 넣고 플레이해보는 공간을 마련했다. “관객의 다양한 반응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다. 아는 분들은 추억에 잠겨 비디오를 틀어보고, 기계를 처음 보는 관객은 낯설어하기도 한다. 마치 훼손하면 안되는 미술품처럼 기계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관객의 쉼터이자 전시와 연계된 대담을 하는 휴게 공간. “초입부에 비디오 열람 코너가 마련되어 있어 직접 재생해볼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전시가 시작됐는데 평일에는 아직도 1천명 이상의 관람객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성인물과 에로영화를 모아놓은 레드존. “에로 비디오는 당시 비디오 산업의 중요한 축이었다. 시대를 풍미한 에로 스타도 많이 나왔고, 클릭 엔터테인먼트 등 잘나가는 레이블에서 대량생산하던 시기가 있었다.”
▼“강시영화는 홍콩영화나 호러영화 중에서도 특히 인기 있는 장르였다. 희소성이 있는 만큼컬렉터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품목이다. 한 섹션으로 따로 분리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한 장르가 이만큼 다양하게 변주된다는 걸 한눈에 보여주고 싶어 가능한 한 한 코너에 모아보았다. 특정 테마로 영화를 모으는 컬렉터들에게 수집품을 양도받은 적도 있다. 가령 어떤 분은 영화제 수상작만 모으기도 했다. 모은다는 것에는 이렇게 각자의 기억과 기준, 바람이 담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 모든 수집품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할 수 있는 너른 광장 역할을 맡고 싶다는 마음으로, 물리적으로 허용된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모았다.”
▼“ACC에서 정리한 원칙을 존중해 분류 작업에는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대신 시네필이 사랑한 영화와 나의 추천 영화를 별도의 섹션으로 마련했다. 알랭 코르노 감독의 <세상의 모든 아침>(1991)은 미장센의 힘이 탁월하다. 한국영화 중에서는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8)을 꼽았다. 그는 영화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진정한 시네아스트 중 한명이다. “당시 비디오들을 보면 제목 번역이 재미있는데, 원제와 상관없이 최대한 자극적인 제목으로 뽑았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브라질>(1985)을 <여인의 음모>로 출시하는 식이다. 제목과 포스터 디자인을 보면 당시 비디오 산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조대영씨는 비디오 수집가이기 이전에 광주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영화 운동가다. 1994년부터 페미니즘영화제, 컬트영화제, 환경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를 직접 개최했고 정성일, 박찬욱, 변영주 등 감독들을 초청해 강좌도 진행했다. 직접 디자인한 영화제 포스터 앞에 선 조대영씨.
▼조대영씨가 사비로 유지 중인 개인 수장고. 비디오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서적과 잡지 2만여권을 보관 중이다. “언젠가 제대로 된 공간이 마련되어 여기 잠들어 있는 수많은 자료가 공적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