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상 흥미로워하는 분야라 반가웠다. 학부 시절에 고미술학에 관련된 수업을 들은 적이 있고 주변에 고고학을 전공한 큐레이터 지인이 있어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학문도 낯설지 않았고 자문도 구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현장 실습을 못 간 게 아쉽다. 맡은 배역의 면면이 피부에 와닿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식물을 좋아하고 흙에 익숙한 사람이라 영실이 가까이 두는 것들을 어렵지 않게 손에 익힐 수 있었다.
-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관련 직업인을 만나거나 현장에 들르곤 하나.
= 그러려고 노력한다. 영실이 의사였다면 아마 병원 견학을 알아봤을 것이다.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비슷한 설정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영상물과 달리 책은 상상의 여지가 많아 상황이 완전히 들어맞지 않더라도 끌어다 쓸 게 많다. 영실을 준비할 땐 허수경 시인의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는 산문집을 읽었다. 감독님이 추천해주셨는데 고고학을 전공한 허수경 시인이 바빌론을 중심으로 고대 건축물을 발굴하는 과정에 참여해 쓴 책이다. 작가님이 과거의 사라진 것들과 대화하는 걸 보면서 영실도 이랬겠구나 짐작했다.
- 책에서 레퍼런스를 찾고, 글의 행간을 짚어내는 방식 같은 것들이 미학을 전공한 것과 무관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데 전공과 달리 원래 법조인이나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 사회 비리에 맞서는 걸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법대에 가고 싶었는데 점수에 맞춰 인문학부에 진학했다.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미학과가 너무 재밌었다. 영화나 연극을 원래 좋아해서 내 취향이 그런가보다 하며 미학과를 택했는데 제대로 공부해보니 정말 어려운 학문이었다. (웃음)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 이것저것 해봤고, 연극을 보며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 연극을 좋아한다 해도 그냥 관극하는 취미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직접 해봐야겠다는 의지로 나아가게 했나.
=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땐 연기의 세계가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데, 직접 눈앞의 배우를 통해 보다보니 어느 순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물론 거기 다다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도 연극을 했고 대학로에서 연극도 많이 봤지만,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뒤늦게 들었으니까.
- 연극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인지 바쁜 시간을 쪼개 최근까지 연극 무대에 올랐다. 연극에 참여할 때 어떤 에너지를 얻나.
= 성격상 나에게 집중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기할 때마다 나와의 싸움을 펼쳐야 하는데 무대에선 그런 부담감을 잊고 몰입하기 쉽다. 블랙박스처럼 조명이 한곳에 몰리고 관중이 숨죽여 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는 사실을 잊고 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 그래서 내겐 여전히 무대에 오르는 순간이 필요하다.
- 지난해 <사랑의 고고학>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는데, 올해는 국제 장편 심사위원이 되어 영화제를 찾는다.
= 과분한 자리라 고사하려 했다. 그렇지만 나 말고 심사위원들이 더 계시니 좀더 관객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의견을 보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정말 잘하고 싶어서 영화를 두번씩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더라! 그래도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두번씩 보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최근 내 영화 취향이 서구권에 치우쳐 있다는 걸 깨달은 상태라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경험이 시선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 여긴다.
-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한때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길 꿈꾸기도 하지 않았나. 만약 프로그래머로서 개인 취향이 반영된 기획전을 꾸린다면 어떤 작품을 틀고 싶나.
= 음… 당장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이니셰린의 밴시>가 떠오르는데 이미 많이들 보셨을 것 같고. 이번에 <컨버세이션>을 보고 전에 놓쳤던 <에듀케이션>을 봤는데 정말 좋더라. <에듀케이션> <킬러들의 도시> <파리 13구>, 마지막으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을 고르겠다.
- 그동안의 형사, 특전사, 악귀 등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는데 영실은 그 흐름에서 조금 벗어난 인물이다. 필모그래피가 다채로워졌다는 인상인데, 앞으로 또 어떤 인물을 만나보고 싶나.
= 영실처럼 독특하고 흥미를 끄는 지점이 있으면 다 반갑다. <나의 해방일지> 같은 힐링물이나 의학물, 법정물도 좋고. 전문직이더라도 일이 부수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일을 통해 겪는 일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도 환영이다. 특히 여성의 일과 사랑, 삶과 관련된 일들을 풀어내는 작품을 선호한다.
- 듣다 보니 <사랑의 고고학>이 떠오른다.= 아 그러네! (고개를 끄덕이며) 음, 내가 영실이를 좋아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