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배우 김희애 X 문소리, 서로를 알아본 여자들
2023-04-20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그림, 약간 비현실적이다. 캐스팅 발표 단계부터 쏟아진 호응을 실감했는지.

김희애 몰라요 잘…. (웃음) 일 없으면 주로 집에 있고, 기대감에 들뜨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래도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런 반응 보이는 걸 선물로 생각하고 있다. 옆에 있는 (문)소리씨만 해도 그렇다. 엄청나게, 열정적으로 쏟아붓는 모습을 보았다.

문소리 아이, 참 선배님 또….

- 오진석 감독이 제작보고회에서 이야기의 뼈대를 세울 때 우선 <델마와 루이스>(1991) 같은 여성 버디물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정치 드라마가 된 건 이후 살이 붙으면서라고.

김희애 안 그래도 아까 대기실에서 우리끼리 이어서 ‘스몰토크’를 했는데, <델마와 루이스>가 마지막에 어떤 미지수를 남겨놓았다면 <퀸메이커>는 그보다 선명하고 통쾌한 면을 살린 게 아닌가 싶다.

문소리 시작은 <델마와 루이스>였으나 끝은 다르게 갔달까.

김희애 맞아. 우리 드라마는 더 경쾌해. 요즘 말로 뭐라고 하지, 속 시원한 사이다? (웃음)

<델마와 루이스>보다 뜨겁게, ‘워맨스’보다 쿨하게

- 재벌가의 각종 위기를 관리하는 전략기획실 수장 황도희와 ‘우먼 파워’를 외치는 인권 변호사 오경숙. 두 사람의 캐릭터 이야기를 해보자. 극 초반부에 두 캐릭터가 첫인상과 다른 의외의 면모를 속속 보여준다. 캐릭터 구축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을 받는 전개다.

김희애 황도희는 부족함 없이 살아온 사람일 것 같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람이다. 처음엔 내게도 굉장히 강단 있고 노련하고 스마트한 사람이라는 인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연기를 할수록 감정적이게 됐달까, 나도 모르게 도희에게 빠져들어서 자꾸 살을 붙이고 감정을 섞는 일들이 이어졌다. 이런 경험은 또 새로워서 황도희를 통해 배우로서 성장했다고 느낀다.

- 차기 서울시장 후보가 저지른 범죄와 부하 직원의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황도희는 각성의 순간을 거친다. 인생의 행로를 바꿀 정도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했나.

김희애 특정 사건의 영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황도희란 여자가 살아온 배경과 성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정 넘치는 일반 신입 사원에서 시작해 재벌가의 내부자가 된 이후에는 은성그룹이 잘돼야 직원과 노조가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일에 맹목적으로 투신했다. 최선을 다해 살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어떤 지경에 이르러버렸지만, 오경숙을 만나서 옛날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황도희는 오경숙의 어떤 매력에 끌렸을까.

김희애 (문소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지. 정말 너무 의리의 여자! 인권 변호사에서 시장 후보가 된 후에도 눈앞에 성공이 보일 때 의리를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소리 어머 그건 6화 지나고 나와서….

김희애 아 참, 나 좀 봐. (웃음) 오경숙의 그런 모습에 반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퀸메이커>를 찍는 동안 ‘그래,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지’ 싶더라. 이렇게 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나도 도희로서 점점 더 마음을 열고 인간적으로 변해갈 수 있었다.

- 오경숙은 일종의 영웅 캐릭터지만 빈틈도 많이 보여준다. 도희를 만나기 전까지 수년간 노동운동을 하다 어느덧 지쳐버린 사람이기도 하다. 남몰래 회의감도 느끼고 있는데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이 인물에게서 어떤 레이어를 봤나.

문소리 많이 흔들리고 중간에 포기하려고도 하고… 그렇지만 끝내 자기 가치관은 포기하고 싶지 않고. (웃음) 그런 내적 갈등이 있기 때문에 두 여자가 더 진심으로 엮이고 싸움도 흥미진진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준비 단계에서 경숙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인권 변호사로서 헌신하게 되었을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어머니와 관련된 전사가 있었는데, 엄마를 위해 고등학생 때부터 1인 시위를 하다가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이었다. 오경숙은 말하자면 그때부터 자기 삶의 퀸이 아니었을까?

김희애 (감탄) 아….

문소리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을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사람들, 그런 여자들이 ‘퀸’ 아닌가? 경숙은 시장 상인들, 여성 해고 노동자를 자기가 돕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곧 자기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끌어왔기 때문에 지도자적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퀸메이커>는 퀸을 계급적 의미가 아니라 자기 세상의 주체를 가리키는 말로 본다면 경숙은 도희를 만나서 더 넓은 세상에서, 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퀸이 된다.

- 웹소설·웹툰에서 팬덤 용어로 ‘혐관’이란 말이 쓰인다. 표면적으로는 ‘혐오 관계’의 줄임말이지만 속뜻은 혐오하는 사이로 만나서 결국에는 서로 스며들고 나중에는 사랑하게 되는 관계성을 말하는데 <퀸메이커>에도 이를 적용하는 온라인 반응들이 관찰된다.

문소리 우리네! 우리 혐관이었구나.

김희애 아니, 그런 관계가 인기가 많나봐? 용어까지 나오는 거 보면.

문소리 (속닥이며) 주변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결혼해서도 잘 살더라고.

김희애 (맞장구) 음, 그게 낫겠네. 좋아해서 결혼했는데 나중에 혐관되느니. (일동 폭소)

문소리 하하하, 정말 그게 훨씬 낫지.

- 앙숙처럼 굴던 <살인의 추억> 속 시골 형사와 도시 형사가 어느새 서로의 수사법을 바꿔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퀸메이커>의 두 여자도 절묘하게 스며드는 포인트가 있나. 마케팅에선 ‘워맨스’라는 수식도 곧잘 보이는데.

김희애 우린 좀더 쿨한 관계인데 난 그게 더 좋은 것 같다. 서로를 엄청나게 아끼고 사랑한다기보다 묵묵히 상대를 완전히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관계다. 거대한 파도를 함께 헤쳐나간 뒤에는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도희는 도희의 삶을 살 거다.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또 다가올 날들을 살아야지. 현실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그 사람 본연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주고 잘되기를 힘껏 박수쳐주는 게 최고의 사이 아닐까. 그리고 도희가 퀸메이커이긴 하지만 경숙에게 덕 보려고 하는 인물은 아니다. 퀸이 탄생하는 순간 퀸메이커의 성취도 끝난다. 그 이후의 무언가에 대한 기대 없이 깨끗한 감정으로 남는 게 중요했다. 그게 훨씬 매력적이기도 하고.

문소리 경숙은 사람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라 자신이 도희와 관계를 맺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여잔 자기 안에 누군가를 들이면 절대 내치지 못하는 성격이다. 도희의 인간적인 면을 알면 알수록 경숙 혼자서 남몰래 속으로 인정했을 것 같다. ‘나는 이 관계를 절대 끝내지 못하겠구나’라고. (웃음)

- <퀸메이커>의 황도희는 드라마 <밀회>(2014)의 예술재단 기획실장인 오혜원도 떠올리게 한다. 지적인 전략가들이면서 스타일과 몸가짐이 중요한 잔상으로 남는 인물들이다.

김희애 우선 사람의 전반적인 실루엣을 갖추는 것. 어느 배우든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옷은 무엇을, 머리는 어떻게, 말투는 어떻고 목소리나 표정의 톤 앤드 매너는 어떨까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해서 나만의 모범답안을 만들어두는 편이다. 카메라 테스트 전부터 최대한 구체적으로 구축해놓는다.

- 마니아들을 생산한 오피스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2019), 5월에 공개될 또 다른 오피스 드라마 <레이스> 사이에 <퀸메이커>의 인권 변호사 경숙이 있다. 회사 소속이든 아니든 다들 대단한 워커홀릭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문소리 그러니까. 나 일복 많게 생겼나보다. (웃음)

김희애 일하는 여성이 가장 매력적이잖아. 자기 자신도 더 과감히 드러낼 수 있고.

문소리 어느 정도 범주가 정해진 오피스룩을 과감히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퀸메이커>의 경숙이 재미있었다. 특히 초반에 백화점 여성 노동자들 위해 고공 농성 중일 땐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모습이면 좋을 것 같아서 한동안 그게 고민거리였다. 내겐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드라마 시청자들이 보시기엔 어떨까, 싶었거든.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의 케이트 윈슬렛 같은 느낌이었다. 첫 장면부터 약간 부은 맨얼굴에 머리 질끈 묶고 나오는 모습을 캡처해서 친구들한테 돌렸다. “이거 정말 맨얼굴 같지 않니?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웃음) 나는 케이트 윈슬렛이 아니고 문소리인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반겨주실까, 불편해하실까 머리 싸매고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보니 또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어서 이런 고민을 하나’ 싶기도 하고.

김희애 깊이 이해한다. 상황에 맞지 않게 화장을 하고 있는 것도 비판을 받지만 최소한의 화장도 배우의 자기 관리 덕목으로 보는 시선도 있기 때문에 드라마 내용과 전혀 관계없이 얼굴에 관한 내용으로 댓글들이 오가기도 한다. 특히 여성배우들에겐 꽤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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