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에서 서로의 연기 스타일을 보면서 받은 인상은 어땠나. 극 중 인물들만큼 각기 뚜렷한 개성이 있지 않았을까 예상되는데.
문소리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희애 선배님은 정말로 완벽하게 준비해 오신다. 그리고 현장에서 한치의 흔들림이 없다. 존경스럽다.
김희애 그건 내가 그렇게밖에 못해서지. 일하러 왔으면 일을 잘해내는 게 상대를 위한 최선의 배려이기도 하잖나. 내가 잘해야 스탭들에게도 피해가 안 간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방식이 몸에 뱄다. 어떤 면에선 현장에서 중간중간 수다 떨거나 여유 부리는 유형이 못 된다. 그에 비하면 소리씨는 IQ가 정말 높은 사람 같다. (웃음) 놀라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처하는 부분이라든가, 팀원들을 아우르는 리더십이라든가. 여러모로 자기 자신을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우린 연기할 땐 무척 다르지만 또 재밌는 게 자연인으로선 교집합이 많다.
문소리 맞다. 서로 집중하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사적인 성향은 비슷한 구석들이 많다. 사는 얘기를 들어보면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조그맣게라도 일을 그냥 다 내 손으로 처리해야 마음이 편하다든지.
김희애 게다가 소리씨는 행동대장이다. 나름대로 자기 커리어가 있는 사람이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여러 배우들에게 연락해 모임도 추진해줬다. 우리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 한쪽은 퀸메이커, 한쪽은 분위기 메이커였던 현장인 건가. (웃음) 함께 호흡을 맞춘 첫 촬영날도 기억나는지.
김희애 물론. 초반 고공 농성 장면에서 처음 만났다. 경숙이 고공 농성 중인 건물 옥상에 도희가 찾아가는 장면이었다. 엊그제 일도 잘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날은 너무도 생생히 떠오른다. 46층의 옥상은 춥고 바람 부는 힘든 현장이었지만 중요한 신이라 잘해내야 했다. 길이도 길어 마음 한편에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첫 촬영이 시작된 순간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문소리 <퀸메이커>는 리허설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내 경우는 그래서 그 신을 찍으면서 모든 게 명확해졌던 것 같다. 대본에서 경숙은 좀더 터프했다고 할까. 정작 옥상 신에서 선배의 강단 있는 존재감을 보고 나니 경숙은 오히려 치고 빠지는 재치 있는 플레이를 해줘야 재밌는 대비감이 생기겠더라고. 뿌리가 강하니까 흔들릴 수도 있으리란 마음으로. 그렇게 황도희와 확실히 대비시키면 우리의 콤비 플레이가 더 재밌어질 거라 판단했다. 도희가 꿋꿋하게 버티는 인물이라면 경숙은 그보다 훨씬 잘 휘청거리고 곧잘 넘어질 것 같으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다.
-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문소리 중꺾마! (웃음)
김희애 ?
문소리 월드컵 때 나왔잖나 선배!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혐관’은 몰라도 ‘중꺾마’는 안다.
김희애 그렇구나….
문소리 <문명특급>에서 선배가 남긴 “독한 게 딴 게 없어. 오래 버틴 사람이 독한 거야”라는 말도 비슷한 데가 있다.
김희애 <퀸메이커>의 이야기가 정말 그렇기도 하니까!
- 정치 드라마는 결국 정치를 쇼 비즈니스로 해석하고 접근하는 연출을 통해 스릴과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오래 버텨온 배우들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면.
김희애 아, 그게… 우리 <퀸메이커> 포스터에 “연기력이 권력이다”라고 쓰여 있길래 처음엔 우리 두 사람이 연기 잘한다는 소리인 줄 알았다. (웃음)
문소리 하하하하.
김희애 두번 생각하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어찌보면 배우의 세계가 훨씬 심플하다. 닮은 데도 있지만 정치적 지형도의 복잡함은 또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감정적인 접근이 필요할 땐 황도희, 오경숙의 성장 서사라는 점에 집중한 측면이 더 크다. 둘의 관계가 점차 발전해나가는 드라마라는 점이 내게는 중요했다.
문소리 대본을 보면서 ‘세상이 뭐 이래?’ 싶다가도 실은 현실이 더하다는 생각이 든 건 사실이다. 뉴스를 보면 우리가 잘 모르고 지나가는 세상의 무서운 일들이 너무 많다. 배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용감한 마음을 지키는 일 같다. 연극하고 영화하는 사람들, 그림 그리고 연주하는 사람들, 다 각자 엄혹한 자기 시대를 통과하면서 용기를 지켜온 것 아닌가. 일을 계속 하다보면 마음이 무뎌질 때가 오는 건 사실이다. 알면 알수록 겁도 많아지고 세월에 물들어가기도 하고, 뭣보다 기운도 딸린다. 그래서 휘청할 때도 있지만 처음에 품은 용감한 씨앗이 썩지 않도록 가끔 볕도 쐬어주고 물도 주면서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렇게 세상도 작품도 계속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김희애 용감해지려면 고민도 많아지지.
문소리 맞다. 나만 해도 아직 겁이 많다. 당장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늘 이런저런 일로 혼자 머뭇대고.
- <퀸메이커>는 여성들의 커리어 전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야망과 야심, 진취성을 자극하면서 고무시키는 요소가 있다. 두 사람에겐 그동안의 긴 배우 생활 중 두렵지만 자기 일에 강력한 시동을 걸어야만 하는 순간이 언제였을까.
김희애 아무래도 여성배우들은 결혼하고 출산까지 하고 나서 한동안 아이를 키우게 되면 배우로서 제2의 출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엔 더 그랬다. 내게는 그때가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였던 게 사실이다. 공백기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인연도 또 새롭게 다가오는 인연도 있었다. 숙고하고 단련하는 시기였던 셈인데 그 시간을 견디고 나자 진취적으로 다시 뛰쳐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내가 배운 건 살면서 앞으로만 나아갈 게 아니라 몇 걸음 다시 뒤로 물러나는 시기가 꼭 필요하다는 거였다.
문소리 나는 커리어 초반에 특히 힘들었다.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그때 내 안에 뭐가 있었길래 사범대 다니다가 배우 하겠다고 뛰어들었는지. 그냥 욱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존경하는 선배들에게서 엿본 용기 같은 것이 분명 내 안에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아시스> 이후에도 근 몇년이 줄곧 긴 데뷔 기간 같았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내 알을 스스로 깨트려야만 했다. 그게 일적으로 강하게 시동 걸 수 있는 트리거가 됐다. 그때가 어쩌면 살면서 필요한 거의 모든 욕심과 야심과 심지어 전략 같은 것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데 정작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 덕분에 이후에도 일하는 게 자신 없고 두려워질 때도 ‘불안하더라도 계속 한번 해보자’라고 쉬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다.
김희애 열정을 갖고 불태우겠다고 해서 삶이 그렇게 마음처럼 불태워지지가 않더라. 모두들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양자경 언니도 말했잖아.
문소리 레이디스, 돈 렛 애니바디 텔 유 아 에버 페스트 유어 프라임!(여성들이여, 누구도 여러분에게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Ladies, Don’t let anybody tell you are ever past your prime.)
- 두 사람 모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양자경 배우의 수상 소감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렇게 정확한 인용이라니.
문소리 몇번이나 반복해서 봤으니까. 영상도 따로 저장해둘 만큼.
김희애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자격이 충분한 사람 아닌가. 깊이 공감한 이들이 정말로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