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영화인과 시민들이 말하는 아카데미극장
2023-04-24
글 : 김수영
사진 : 최성열

커다랗고 낡은 스크린, 2단으로 된 객석과 매표소, 영사기 부품과 램프 등 지금은 여느 극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흔적들로 가득한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과 창작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영화 매체와 감각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는 이곳에서 신수원 감독과 김현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될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앞장서서 동료들에게 보존서명을 독려하는 이명세 감독과 온라인을 통해 마음을 더하고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신수원 감독 | <오마주> 연출

<오마주>를 촬영할 옛날 극장이 필요해서 수소문하다 아카데미극장을 만나게 됐다. 1, 2층으로 되어 있는 좌석에 낡은 스크린, 높은 층고 등 공간 자체가 가진 웅장함이 있었다. 복도 계단 내 벽의 질감이라든지 영사실로 올라가는 사다리라든지, 어린 시절에 봤던 오래된 극장 모습 그대로였다. 세트로 절대 만들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2시쯤 해가 쨍쨍할 때 열어둔 극장 문을 통과한 빛이 낡은 스크린에 어른거리는 장면을 보고 <오마주>의 엔딩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 속 그 장면은 CG 없이 직접 촬영했다.

개봉 직전에 아카데미극장에서 시사를 진행했다. <오마주> 속 아카데미극장이 낡은 스크린 위에 나올 때, 극장에서 극장을 보는데 마치 3D 체험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상영 소식을 듣고 극장을 사랑했던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90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온 50대 여성이 기억에 남는다.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극장에 왔었다던 그분은 영화 보는 내내 옛날 생각이 났다고 했다. 노모에게도 영화 어땠냐고 물었더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라고 하셨다. 그날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외 영화제에 가면 50년,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한다.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게 너무 부럽고 우리나라에서는 광주극장이나 원주 아카데미극장 정도가 남아 있는데 60년 역사의 건물을 철거하고 주차장이나 공연장 같은 뻔한 시멘트 건물을 짓는다니 안타깝다. 원주 아카데미극장 가까이에는 재래시장과 개천, 그리고 오래된 맛집들이 있다. 원주는 KTX가 다닐 만큼 교통 인프라도 훌륭하잖나. 그저 추억팔이 때문에 극장을 보존하자는 게 아니다. 원주가 가진 좋은 자원을 활용하면 오히려 썰렁한 구도심을 살릴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김현정 감독 | <유령극> <흐르다> 등 연출

원주 아카데미극장에서 ‘필름클래스_영사기조립반’ 수업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시민들이 극장 보존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마음이 가서 아카데미극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동성아트홀이 운영 문제로 사라지는 걸 봤기 때문에 아카데미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부럽기도 했다. <흐르다> 연출 이후 새 작품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때라 아카데미극장에서 수업하는 동안 영화 매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필름으로 직접 영화를 상영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이미 본 영화인데도 그곳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생소하고도 특별했다. 공간이 주는 감각, 영화를 보는 경험까지 포함해서 ‘이게 영화구나’ 하고 느꼈다. 아카데미극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 <유령극>에도 그때 느낀 경험과 감각을 담아보려고 했다. 아카데미극장에서의 관객 경험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값지고 고유한 것이다. 관객에게 대체 불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에 아카데미극장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명세 감독 | <M> <형사 Duelist> 등 연출

원주 아카데미극장 철거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고 무력감을 느꼈다. 마침 원주에서 활동하는 권미강 시인이 ‘아카데미극장 보존서명 함께하기’ 링크를 문자로 보내줬다. 5천명의 서명이 필요하다기에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싶어 감독과 배우들에게 서명해달라고 링크를 퍼트리고 있다. 영화감독 이전에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곳곳에 문화공간이 보존되기를 바란다. 극장은 문화공간이자 이야기의 공간이다. 역사가 그렇듯 오래된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있다.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 중 누군가는 거기서 연애를 했을 거고 누군가는 고달픈 날 극장에서 위로받았을 거다. 오래된 문화공간이야말로 세대와 장소를 넘어 이야기를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다. 이 사연 많은 극장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건 콘텐츠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 아닌가. 도시 재생의 좋은 사례로 꼽히는 런던 리버풀시에서는 강 주변의 몇백개 창고도 그대로 활용해서 문화도시를 만들었다. 원주는 이미 그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모쪼록 극장이 오래 지켜졌으면 좋겠다.

이지현 | <시민 한마디!> 캠페인

“아카데미극장은 그냥 오래된 건물이 아니에요. 지나간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연결되는 ‘현재’의 살아 있는 극장, 공간입니다.”

이민희 | <시민 한마디!> 캠페인

“우리 엄마의 추억이 있는 극장에서 저도 영화를 보고 싶어요. 엄마와 같은 곳에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 같아요.”

정이삭 | <시민 한마디!> 캠페인

“세대간 갈등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존중하지 않음은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고 이해하지 못함은 체감된 기억의 부재에서 옵니다. 모든 인류에겐 박제되지 않은 살아 있는 체감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원주 시민 모두에게 체감의 기억을 환기해주는 원주 아카데미극장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경시하지 말길 바랍니다.”

김용규 | 보존서명 한마디

“많은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아카데미극장 옆 시장 좌판에서 나물 팔던 우리 할머니. 사촌 누나와 봤던 <실미도>. 고교 시절 특별활동 영화감상반에서 본 <해리 포터> 시리즈. 티켓 파는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얻은 클래식 포스터 등등. 저만 그런 게 아니겠죠. 이곳이 사라지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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