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2023년, ‘아기공룡 둘리’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2023-05-25
글 : 이자연

2011년 한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이 들고 보니 얄미운 만화 속 캐릭터는?”이라는 주제의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 있다. 20%가 넘는 응답으로 <톰과 제리>의 제리가 1위를 차지했고, 근소한 차로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가 2위에 올랐다. 3위는 <아따아따>의 2살배기 딸 단비다. 이외에도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와 <도라에몽>의 진구, 또 <아기공룡 둘리>의 희동이가 뒤를 이었다. 총투표수는 6939표. 복수 응답을 고려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렇다면 이 설문 결과는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이 오락용 집계가 말하지 않은, 사회 전반에 장착된 눈총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고양이 톰을 영리하게 골탕먹이며 관계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제리를 뺀 나머지 캐릭터의 공통점을 찾자면, 모두 자의적·타의적으로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라는 사실이다. 한순간에 엄마와 고향을 잃은 둘리, 양육자와 신체적 반응으로 소통하는 단비, 정제된 판단에 익숙지 않은 짱구, 친구와의 관계가 어려운 진구, 둘리의 보살핌이 필요한 희동이까지.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어 어른 눈에는 한없이 서툴고 답답하기만 한 아이들이다. 여기서 주요 질문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 설문에서 정말 묻고 싶은 건 단순히 ‘얄미운’ 캐릭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나이 들고 보니’라는 조건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때는 모두가 둘리고 단비고 짱구였겠지만, ‘나이 들고 보니’라는 안전한 전제 속에서 어른이 된 나, 더이상 아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나, 민폐 끼치지 않는 나로서 답변자들은 간단하게 아이들만 골라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1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둘리와 시대와 민폐에 대하여

온라인 세상에서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 친구 훈이는 ‘훈발놈’(이름+욕설의 합성어)이라 불린다. 주로 친구들을 배신하거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렇다. 짱구도 감동을 줄 땐 ‘갓구’(신을 의미하는 God+이름의 합성어), 말썽 부릴 땐 ‘X구’(욕설+이름의 합성어)로 불린다.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는 어른들이 결정한다. <명탐정 코난>의 어린이 탐정단의 별명은 무려 ‘발암 탐정단’이다. 사건을 더 악화시킨다는 이유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이 어린이들을 얄미운 캐릭터로 바라보는 수준을 넘어 교묘하고 악질적인 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죄목은 단 하나, 민폐다. 사건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어린이들은 명랑 만화의 주인공으로서 인정받기보다 민폐 사례를 더해나가는 주축으로 수용됐다. 그 인물 곁에 어른 캐릭터가 있으면 반발심이나 이유 모를 미움은 더 커진다. 고길동 위키피디아에 ‘(둘리로 인한) 피해 목록’란이 따로 마련돼 있는 이유도 그렇다. 김수정 작가가 <아기공룡 둘리>를 처음 연재하던 80년대, 만화에 대한 검열이 심해 말대답하는 어린이를 그릴 수 없어 아기공룡으로 전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어른들이 예의 바른 아이, 어른에게 순응하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 검열했다면, 40년이 흐른 지금은 민폐 끼치지 않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 검열한다. 착한 아이일까, 나쁜 아이일까. 이 아이에겐 어떤 별명을 지어줄까.

도대체 민폐란 무엇인가. 민폐는 사전적 의미로 ‘민간에 끼치는 폐해’를 의미하지만 일상적으로 설명하면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결국 무엇이 폐를 끼치는 것인지 기준이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발언권이 적은 약자들은 쉽게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운명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둘리도 억울한 면이 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는 고길동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맨날 사고만 일으키는 뻔뻔한 아이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는 책임감 있는 어린이다.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어린 희동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둘리고(심지어 유자녀 어른이 둘인데도), 밥에 모기약이 들어가면 일식, 중식, 한식은 물론 프랑스 요리까지 만들어 모두의 배를 불린다. 실질적으로 육아와 가사일을 모두 해내는 중차대한 역할을 도맡고 있지만 “집 없는 게 죄”라는 둘리 말대로 평가절하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게다가 고길동의 가족 구성원은 둘리의 초능력으로 모든 일을 쉽게 이루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누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다시 볼까

하지만 중요한 건 모두가 둘리 같지 않다는 점이다. 비난의 목소리에 반박할 만한 착한 행동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로 구분해버리면 어린이 캐릭터는 새로운 어려움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민폐 여부를 계속해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관객과 시청자가 인지해야 하는 건 이들이 어린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사고 친 뒤, 고길동이 호통을 칠 때면 둘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다. 외로운 가로등 밑으로 현관 외벽에 기대어 가족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는 홀로 시간을 보낸다. 어쩌다 처음 만난 또치와 함께 쫓겨났을 때 둘리는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가 잘 때 들어가면 돼. 같이 있어 줄 거지, 응?” 하고 묻는다.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여느 아이의 서글픈 모습으로. 눈 떠보니 불현듯 실향민과 고아가 돼버린 둘리의 슬픈 사연은 여러 장면을 통해 드러나지만 어른들의 무딘 이해심에 양해받지 못한다.

고길동을 공감하는 순간 진정한 어른이 된 거라는 말은 이제 하나의 밈이 되었다.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에필로그에 무단결근 8일로 시말서를 써야 하는 길동의 모습은 같은 직장인으로서 온몸이 경직되는 결말이다. 무려 우주 해적 바요킹과 격전을 치른 다음날 보통의 날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출근한 것도 경이롭다. 이렇듯 가장으로서 그의 피로와 노고에 이입하며 많은 이들이 길동을 예찬한다. 하지만 우리가 놓친 사실이 하나 있다. 길동은 단순히 성실과 근로자의 아이콘만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둘리 삼총사를 ‘받아준’ 인물이라는 것. 그들에게 방 한칸을 내어주고 화를 낼지언정 밖으로 내몰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이 쉽게 간과되었다. 나는 궁금하다. 이해와 존중의 책임은 지지 않은 채 비난만 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정말 스스로를 고길동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사진제공 둘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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