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막내 공주는 원래 말이 많지 않았다. 다섯 언니들과 달리 그는 늘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15살이 되어야 바다 위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인어공주는 늘 먼저 뭍의 세계를 경험한 언니들을 부러워한다. 드디어 막내가 15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 그는 16살 생일을 맞이해 배 위에서 파티를 여는 왕자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인간과 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다. 궁궐 일을 돌보는 인어공주의 할머니는 인어는 300년 동안 살 수 있는 대신 영혼이 없기 때문에 한번 죽어 물거품이 되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인간은 영원한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하늘나라 너머 어딘가로 갈 수 있다. 인어가 그들처럼 영원한 영혼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과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들의 눈에는 물고기 같은 꼬리를 가진 인어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인어공주는 자신과 다른 집단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목소리를 내놓고 날카로운 칼로 다리를 베이는 듯한 고통을 감수한다.
일탈의 종착지는 자유와 로맨스
198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인어공주>의 에리얼이 인간 세계를 갈망하는 이유는 불멸의 영혼보다는 자유에 있다. 에리얼은 일방적으로 인간을 갈망하는 외부자이며, 문화를 학습하지 못한 그가 포크로 머리를 빗는 신이 유머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쪽 세계가 정상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비극을 택한 동화와 달리 왕자와 결혼에 성공한 디즈니의 각색은 마치 인간 집단의 편입이 궁극적인 목표처럼 비치게 한다. 동화에서 바다의 왕 트라이튼의 어머니가 점유하던 위치가 사라지고 대신 절대 권력에 반기를 들었던 우르술라가 집안에서 퇴출돼 바다 마녀가 됐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가부장제에 위협이 됐던 악녀가 왕자가 인어공주를 구원하는 과정을 훼방놓는 그림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품은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2023년, 고전 애니메이션 속 공주 캐릭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프로젝트를 이어오던 디즈니가 <인어공주>의 실사판을 내놓았다. 라이브 액션 <라이온 킹>이 그랬던 것처럼 동명의 애니메이션영화에서 기본 스토리부터 스커틀(아콰피나), 세바스찬(더비드 디그스), 플라운더(제이콥 트렘블레이) 같은 조연 캐릭터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몇곡의 O.S.T가 추가되긴 했지만 가장 유명한 넘버 <Part of Your World>와 <Under the Sea>를 애니메이션의 해석을 계승하는 방향으로 등장시킨다. 표면적으로 가장 달라진 부분은 에리얼 역에 흑인 가수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했다는 점이겠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변화한 캐릭터는 에리얼과 사랑에 빠지는 에릭 왕자(조나 하워킹)에 가깝다. 흑인 어머니를 둔 그는 입양아이며 따분한 궁에 틀어박히기보다는 목숨을 내놓고 항해하기를 원하는 개척자다. 다른 선원들처럼 인간을 홀리는 세이렌 전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미신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에리얼과 에릭 왕자의 로맨스는 한쪽의 일방적인 구원이 아닌, 이질적인 집단이 서로에게 갖는 공포와 화합의 과정을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로 근거를 만들어간다. 기본적으로 에리얼과 에릭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항아이며 이같은 기질은 상대에게 운명적으로 끌리게끔 작동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어공주>의 에리얼 역에 비백인 배우가 필요했던 이유가 시작된다. 롭 마셜 감독의 <인어공주>는 원작 동화의 여섯 자매를 7대양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인어들로 다시 읽는다. 전세계와 연결된 바다 왕국이 혈연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공주는 동양인도, 라틴계도, 그중 막내는 흑인도 될 수 있다. 바다 위 세계에서도 혈연 통치가 무너지고 있다. 다만 거시 집단간의 교류는 아직 요원하다. <인어공주>의 배경은 구체적인 시대와 지역을 추정하기에 다소 불균질하지만, 다인종·다문화 국가의 존재가 자연스러운 데 반해 아직 국가주의와 인종차별이 잔재한 현대사회의 풍경을 투영하기에는 적절하다. 인어와 인간, 흑인과 백인, 이질적인 집단에 소속된 이들이 자유라는 가치를 공통분모 삼아 경계를 넘는 일탈은 실사영화 <인어공주>에서 유독 부각되는 육지 위 시퀀스의 활력으로 시각화된다.
논란 위로 전하는 화합의 메시지
4년 전 실사영화 <인어공주>의 에리얼 역에 흑인 가수 핼리 베일리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부터 일부 관객은 “나의 에리얼은 이렇지 않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들이 말하는 에리얼의 기준은 1989년 개봉한 애니메이션이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에리얼은 빨간 머리를 한 백인이었기 때문에 굳이 그 캐릭터를 흑인이 연기하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디즈니 산하 채널 <프리폼>은 공식 트위터에서 “에리얼 캐릭터는 가상이다. 그는 전세계 바다 왕국에서 살고 있고 어디에서든 헤엄칠 수 있다. <인어공주>의 원작자는 덴마크인이고, 덴마크인이 흑인일 수 있는 것처럼 덴마크 인어 역시 흑인이 될 수 있다”며 논란에 답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핼리 베일리의 캐스팅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라고 일침을 놓았다. 사실 실사영화 <인어공주>가 직면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다른 곳에 있다. <라이온 킹>을 위시한 최근 디즈니사의 라이브 액션 프로젝트가 남긴 교훈은 특히 익숙한 동물이 등장하는 판타지를 믿게끔 하는 도구로 셀애니메이션이 실사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인어공주>에 투입된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스커틀, 세바스찬, 플라운더가 등장하는 장면은 종종 현실 세계의 논리를 의식하게 한다. 라이브 액션 <라이온 킹>을 두고 어떤 관객은 심바의 성장과 티몬, 품바와의 우정을 압축한 <Hakuna Matata> 시퀀스를 보면서 사자가 멧돼지와 미어캣을 덮칠 것 같아 무서웠다고 전한다.
<인어공주> 역시 실사화의 함정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세바스찬과 플라운더가 등장하는 신에서 아예 생선 요리를 직접 언급하는 몇몇 신은 예정된 불호를 너스레로 맞받아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사실적 구현에 집중한 심해의 어두운 톤은 <인어공주> 텍스트가 품은 특유의 동화성을 퇴색시킨다. 실사영화 <인어공주>를 둘러싼 양가적인 반응은 정치적 올바름의 의식이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업데이트든 현실을 의식한 시도와 인기 IP의 생명력을 잇고자 하는 거대 미디어 그룹 디즈니의 욕망, CG 기술의 과시가 충돌하며 빚어낸 결과다.
하지만 몇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동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이어 이 텍스트가 한번 더 각색되어야 할 당위를 설득한다. 동화는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고,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발표한 1837년의 덴마크는 아직 왕과 귀족 계급이 존재했다. 인간 세계를 갈망하다 물거품이 되는 동화 속 인어공주의 비극이 신분제 사회의 한계를 보여준다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에리얼의 적극적인 면을 부각해 이를 넘고자 시도한다.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일방의 계급 상승이 아닌, 다문화의 화합으로 주제를 확장한다. 집단의 감각과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동화는 이처럼 현대적 의미를 흡수하며 진화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작가 바버라 G. 워커가 재해석한 <막내 인어공주>의 주인공은 일부러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어부들에게 위협적인 장난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원래 왕자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공주가 원치 않은 정략결혼을 거부하면서 왕자는 인어공주와, 공주는 그가 진짜 사랑하는 대마법자와 각각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이미 전통 동화를 파격적으로 해체하는 여러 시도가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현시대에 34년 전 애니메이션보다 이번 각색이 소구할 지점을 찾아냈다.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한 명분을 가진 업데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