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경희를?’ 배우 장선이 <비밀의 언덕> 대본을 받아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전작이 <바람의 언덕>이라 제목의 연결성이 재밌다고 생각한 동시에, 글이 좋아서 꼭 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내게 경희 역을 제안하신 게 의외였다.” 명은(문승아)의 엄마인 경희는 시장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한다. 시종 태평한 남편 성호(강길우)와 달리 “당차고 대차게” 가정을 일궈나간다. 영화 <소통과 거짓말>에서 어리고 미숙한 엄마를 연기해봤으나 경희는 “아이들과 보낸 시간들이 잘 드러나야 하는 역할”이었기에 고민이 됐다. 하지만 경희 역시 부모 역할에 서툰 젊은 엄마라는 이지은 감독의 설명을 듣고 ‘그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캡모자와 앞치마는 경희에게 유니폼과 다름없다. “시장의 조명이 워낙 세서 실제로 모자를 많이들 쓰신다더라. 그리고 내가 캡모자가 정말 안 어울리는데, 역설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못 쓸 만큼 바쁜 경희의 상황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동에 익숙한 몸과 행동이 중요했기에 경희가 매일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그려보곤 했다. “아이들 식사만큼은 제대로 챙겨주지 않나. 현실이 녹록지 않다 여기면서도 항상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려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장선은 명은과 마찬가지로 반장에 당선됐으나 바쁜 어머니에게서 ‘꼭 해야겠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작아진 등을 감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으로선 “우리 엄마도 참 대단했다”라며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됐다. <비밀의 언덕>을 촬영할 당시 명은과 경희의 입장에 고루 공감할 수 있었던 셈이다.
경희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집을 떠올리며 좋아하는 인테리어 이미지를 스크랩해둔다. 경희의 이 ‘비전 노트’는 장선이 직접 만들었다. “명은이처럼 경희 역시 현재의 삶이 아닌 다른 자아상을 바라며 살고 있는 거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잘 와닿았다.” <비밀의 언덕>을 계기로 눈컴퍼니와 계약한 장선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며 더 좋은 작품,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배우 장선’의 비전 노트를 만든다면, 걸 크러시 대신 ‘할매 크러시’라고 적고 싶다. 내가 만든 말이다. (웃음) 그만큼 나이 들어서도 꾸준히 다양한 역할로 배우 생활을 지속해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