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과묵함, 가장으로서의 무게, 왠지 모를 거리와 어색함. <비밀의 언덕>의 성호는 이런 전형적인 아버지의 초상에서 가장 먼 자리에 서 있다. 무능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제 할 일은 하고, 철이 없는 건가 싶다가도 문득 듬직해 보이는 남자.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해맑은 성호 역의 강길우 배우도 아빠 역할은 처음이다. “당시 보던 시나리오가 몇개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아이를 다룬 영화들이었다. 그중 제일 마음을 흔든 작품이 <비밀의 언덕>이었다.” 이번 역할은 강길우에게도 신선한 도전이었다. “그동안 주로 무겁고 진지한 배역을 맡아왔는데 성호는 정반대 캐릭터인 점이 좋았다. 성호는 전형적인 아버지상과 달리 가볍고 친근하다. 아들 역은 많이 했어도 아버지는 처음이라 내 아버지나 어린 시절 삼촌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다가갔다.”
<비밀의 언덕>은 아이의 시선으로 전체를 그려나가는 영화가 아니다. 어른의 시선에서 아이를 바라보기도 하는, 고른 시선의 영화다. 이지은 감독은 굳이 ‘아빠’라는 호칭이 아니라 ‘성호’라는 이름을 고집했다고 한다. “길지 않더라도 성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내 생각에 성호는 순수한 사람 같다. 가령 딸 명은(문승아)은 하루 종일 집에서 자고 있는 성호의 뒷모습만 보는데, 실은 성호가 명은의 시선을 느끼면서 자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좀 부끄러우니까. 능력이 없는 건 알고 있는데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는 치고 싶고. 그러다 보니 마음과 달리 행동이 거칠어지거나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 지르는 장면을 연기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찍으면서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났다”는 강길우는 “부모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 영화”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분명 딸이나 아내 입장에선 성에 차지 않는 아버지, 모자란 남편이다.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부모 역할을 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호를 연기할수록 문득 우리 아버지들도 다 비슷한 기억이 있겠구나 싶었다.” 열쇠고리를 주렁주렁 허리춤에 차고 바지를 배꼽 위까지 추켜올려 입은 성호의 모습에는 1990년대의 공기부터 가족의 초상이 입체적으로 묻어 있다. “디테일이 꽉 찬 영화다. 명은이 쓴 글의 내용이라든지 알고 보면 재미있는 장면들이 무척 많다. 2회차 관람하면서 보물 같은 순간들을 발견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