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좋게 스타트를 끊었다. 7월26일 개봉하는 <밀수>는 1970년대 가상의 어촌 마을 군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해양 범죄 활극으로 현재 <베테랑2>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이 <모가디슈> 이후 내놓은 12번째 장편영화다. 배우 김혜수, 염정아를 성수기 텐트폴 영화의 여성 투톱 주연으로 내세워 상쾌한 첫인상을 보여준 <밀수>가 극장가에 새로운 흥행 물길을 낼 수 있을까. 올여름 개봉하는 한국영화 빅4(<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 첫 타자로 나선 <밀수>의 관전 포인트를 소개한다.
Q1. 류승완의 영화들 중 <밀수>의 위치는 어디쯤?
근작들과 비교하자면 <밀수>는 <모가디슈>의 정감과 <베테랑>의 호방함이 조화롭게 만난 모양새다. 1970년대 서해안에 자리한 가상의 소도시 군천, 마을 선장의 딸로 사람 좋은 진숙(염정아)과 통 큰 행동대장 춘자(김혜수)가 마을 앞바다를 안방처럼 드나들며 일대를 꽉 잡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해녀 군단의 끈끈함을 딛고 물살을 가르는 <밀수>의 출발은 호쾌하다. 중화학공업화가 지상목표였고 미제 바세린과 일제 라디오가 스리슬쩍 수입되던 시대. 공장 폐수로 서해안이 오염되어 생계를 위협받자 해녀들이 어쩔 수 없이 밀수품을 건져 올리는 해양 비즈니스에 가담한다. 광목으로 만든 물적삼을 입던 시골 해녀들은 곧 나팔바지에 디스코룩으로 무장하고 화양연화를 누린다. ‘돈의 맛’을 알게 된 언니들의 한탕을 다룬다는 점에서 <밀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본격적인 하이스트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캐릭터로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2001) 이후 약 20년 만에 류승완 감독의 여성 투톱 영화가 탄생한 셈이다. 선글라스 낀 여자(전도연)와 가죽 점퍼 입은 여자(이혜영)의 잿빛 투견장 누아르였던 <피도 눈물도 없이>에 비해 <밀수>는 파도와 태양을 끌어안은 쨍한 활극으로 나아간다. 춘자와 진숙 콤비가 음모에 맞서는 여정에 집중하면 외려 <짝패>(2006)가 떠오른다. 개발로 변해가는 고향, 배신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짝패를 이뤄 싸울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애틋함을 이번엔 배우 김혜수, 염정아가 묵직한 아우라로 소화했다.
Q2 누가, 어떤 위기와 감정을 맞이하나?
사실 해녀들의 밀수 작전은 얼마 못 가 거센 파도를 맞이한다. 밀수가 성행하면서 세관 계장 이장춘(김종수)도 덩달아 열혈 단속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진숙의 가족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춘자는 진숙 곁에 남지 않고 단속을 피해 홀로 사라진다. 여기서 <밀수>를 지탱하는 두 여자 사이의 애증 어린 감정적 뼈대도 바로 선다. 슬픔과 복수심을 딛고 한결 굳세진 진숙, 서울에서 전국구 밀수 1인자로 알려진 권 상사(조인성)를 꼬드겨 군천 복귀를 시도하는 지략가 춘자가 갈등 관계로 마주하는 것이다. 붉게 염색한 파마머리 가발을 뒤집어쓴 서울 여자 춘자와 생선 내장이 들러붙은 항구 작업복을 입은 진숙의 세계는 얼핏 보아도 확연히 달라져 있다. 하지만 오해로 결별한 죽마고우가 헤어지는 순간부터 재결합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 콤비 스토리의 매력 아닌가. 죽은 선장을 대신해 마을을 관리하기 시작한 장도리(박정민)가 해녀들을 착취하는 비린내나는 풍경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진숙과 춘자가 다시 만나 작당하는 순간을 반갑고 필연적인 조우로 비춘다.
극 중 남자들에게 곧잘 ‘누님’으로 불리는 여자들이 누군가의 아내나 연인, 어머니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한 요소다. 말하자면 <밀수>에서 두 여자는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버디무비가 요구하는 제1의 역할, 서로의 친구로서 충실히 존재한다. 마을 토박이인 진숙과 이방인 춘자의 관계는 영화 초반부의 집약적인 몽타주 속에서 이미 운명적인 관계로 채색되어 있다. 전형을 숨기기보다 최대한 산뜻하게 포장하면서 진입 장벽을 낮춘 <밀수>는 두 인물이 겪은 위기와 재결합을 기점으로 감정적으로 애틋한 서사적 갈고리를 걸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서사는 저열한 이권 다툼과 남성적 패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여자들의 우정 논리다. 다분히 두목 기질의 소유자인 춘자가 판을 만들면, 책임감 강하고 묵묵한 진숙이 사람들을 품는다. 요컨대 겁없는 항해자와 우직한 등대의 만남. 여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해녀들, 신스틸러인 다방 마담 고옥분(고민시)까지 합세하면서 매사 생존에 절박하면서도 강고함을 잃지 않는 캐릭터들이 따로 또 같이 빛을 발한다.
Q3. 이번엔 무엇이 다른가?
순수와 비정의 대결이라는 류승완 영화의 누아르적 정서를 잃지 않되, 특유의 하드보일드 액션을 바다 활극 스타일로 탈바꿈시킨 결과물이 <밀수>다. 수중 시퀀스는 밀수품을 건져 올리는 탈취극에서 이내 상어가 출몰하는 해양 스릴러의 무대로, 종국에는 후반부를 책임지는 클라이맥스 격투 시퀀스로 탈바꿈한다. 수중 액션 신이 신선함을 확보했다면, 지상 액션은 쿠엔틴 타란티노식 클래식으로 돌아가 정반대의 묘미를 보여준다. 권 상사를 연기한 조인성은 장도리 일당과의 패싸움 신에서 이른바 펄프 누아르식의 잔혹한 살인 기행을 이어가면서 코믹한 요소도 놓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물 안에서나 밖에서나 <밀수>의 액션은 처절함보다는 경쾌함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Q4. 의외의 강력한 한방은?
음악이다. 1970년대의 한국 로큰롤이 영화에 추진력을 불어넣는다. 싱어송라이터 장기하가 류승완 감독의 러브콜로 합류했다. 류승완 감독은 부친이 “경양식집을 운영하며 DJ 음악을 틀곤 했던 기억을 되살렸다”면서 “제작 과정에서 <밀수>의 세계로 나 자신을 가장 빨리 안내해주었던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말했다.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전주를 따라 전개되는 짜릿한 액션 시퀀스나 해녀들의 인생사를 대신 전하는 듯한 신중현, 김정미, 나미, 이은하 등의 목소리도 영화와 훌륭하게 합을 맞춘다. 명곡이 스크린에 이식되었을 때의 위화감이 없다는 게 큰 장점이다.
Q5. 로맨스가 있나?
어설픈 로맨스가 없다는 점이 류승완 감독 영화의 대범한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배우 김혜수가 더한 묘한 화학작용이 종종 의외의 일렁임을 만들어낸다. 오직 밀수를 위한 이익에 집중하며 서로를 속이는 춘자와 권 상사는 분명 비즈니스 관계이지만, 김혜수는 영화 오락의 원초적 재미에 스크린 스타의 글래머러스한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를 잘 아는 배우다. 그는 혈기왕성한 남녀가 잠깐의 욕망으로 서로를 곁눈질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묘한 뉘앙스를 더했다. 한편 김혜수는 시종 하이톤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조춘자의 비즈니스적 페르소나로 일관하다가 진숙과 독대하며 처음 진심을 말하는 장면에서만큼은 내면의 바닥을 긁는 듯한 저음을 들려준다. 만약 <밀수>에 약간의 로맨스가 있다면 한 사람이 온전한 자기를 고백하는 그 목소리에 얹혀 있다.
Q6. 그래서, 재미있나?
<부당거래> <베테랑>이 품었던 뾰족한 가시는 없다. 결말은 퍽 단순하고 판타지적이다. 오락영화의 순기능에 100% 충실한 <밀수>는 서민의 설움, 가족적 비극, 운명적 콤비의 오해와 재결합, 부패한 공무원, 얄미운 빌런과 귀여운 조력자, 클라이맥스 액션 신, 산뜻한 권선징악이라는 한국영화의 필승 코드를 모두 품고 있다. 이를 밀도 있게 가공한 <밀수>라는 종합선물세트는 무난한 만족감을 넘어 활기찬 쾌감까지 전해준다. 한국영화계에 류승완의 등장은 장르영화사의 모범을 개성적으로 모방하는 신인류의 출현에 가까웠다. 감독 자신의 기원을 극대화한 이번 작품은 류승완다움에 치중하기보다 한결 품을 넓히는 또 다른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극장가에 성수기 한국영화의 성공 사례가 필요한 지금, <밀수>는 감독과 배우의 노련미가 골고루 작동한 만족스러운 답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