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조춘자
<밀수>라는 배의 방향키를 쥔 여자는 누가 뭐래도 조춘자다. 묘안의 귀재, 뻔뻔한 승부사.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단 한 사람, 진숙에게만은 솔직하며 불굴의 의리를 지키는 여자. 김혜수가 정의한 춘자는 주인공이 될 만한 성격적 매력을 풍성히 갖추고 있다. 데뷔 37년차 베테랑의 완급 조절은 <밀수>의 톤을 띄워 한껏 채도 높은 오락영화로 만들었다가 뭉클한 여성의 우정 서사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드라마 <사과꽃 향기>(1996)에 특별출연했던 염정아와 삼각관계를 연기한 이후 작품으로 제대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의상과 헤어스타일, 춘자의 작은 소품까지 직접 레퍼런스들을 펼치고 디테일을 결정한 김혜수는 염정아와 또렷한 대비를 만들어가면서 <밀수>에 버디 무비의 깊이를 불어넣었다.
염정아의 엄진숙
<밀수>의 엄진숙은 현실에 있을 법한 조용한 영웅과다. 불의에 저항하고 주변을 챙기지만, 대단한 술수 따윈 잘 모르고 번뇌도 많다. 근심 많은 얼굴로 주저하면서 그러나 제대로 걷고 있는 여자를 ‘재미있게’ 표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염정아는 인물의 비극을 진부하지 않게 표현해냈고, <밀수>에서 관객이 가장 먼저 기댈 수 있는 감정적 기둥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완벽한 타인>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 <클리닝 업> 등 염정아가 최근 필모그래피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평범한 여자의 초상이 <밀수>까지 이어져 묘한 시너지도 내는 듯싶다. 특히 도망간 춘자 없이 홀로 감옥에서 사계절을 보내는 진숙의 시퀀스에선, 엔터테이닝 영화의 큰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적절한 연민과 슬픔의 기운을 불러내는 염정아의 담담한 연기가 빛난다.
박정민의 장도리
류승완 영화엔 꼭 ‘양아치’가 필요하다. 류승범의 계보를 이을 인물이. 출처도 태생도 불분명한 인물 장도리는 해녀들 사이에서 힘깨나 쓰는 남동생으로 챙김받지만, 어느새 <밀수>의 빌런으로 흑화하고 만다.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은 웃기다가도 묘하게 잘 어울려 당황스럽다. 박정민은 옴니버스영화 <신촌좀비만화>(2014)로 류승완과 처음 만나 외유내강이 제작한 <사바하>와 <시동>을 거쳤고 <밀수>까지 합류하게 됐다. 노련한 김혜수와 염정아 사이에서 남의 등 뒤에 칼을 꽂는 비열한 남자를 연기한 박정민. <헤어질 결심>에서 기이한 에너지를 내뿜어 인상을 남겼다면, <밀수>에선 끝까지 능청스러운 힘으로 제 자리를 만든다.
고민시의 고옥분
매력이 분명한 캐릭터기에 고민시는 일부러 힘을 뺀 듯 보인다. 코미디가 필요한 순간에 내지르지만, 앙상블에 집중한다. 그 천연덕스러움이 <밀수>의 고민시를 성공적으로 사랑스럽게 한다. 얇게 그린 갈매기 눈썹 아래 빛나는 초록빛 섀도, 새빨간 립스틱에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다방 마담 고옥분은 군천 바닥 정보통이자 알게 모르게 춘자와 진숙의 매개가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마녀>와 <스위트홈>에서 보여준 의외의 우악스러운 캐릭터들로 주목받은 이후 곧장 <좋아하면 울리는> <오월의 청춘>과 <지리산>을 작업한 고민시는 오디션도 없이 류승완 감독에게 바로 낙점됐다.
조인성의 권 상사
<모가디슈>가 개봉을 앞둔 2021년 여름, 조인성은 <밀수> 촬영장에서 다시 류승완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섰다. <뉴 논스톱>의 청춘이자 <비열한 거리>의 혈기왕성했던 누아르 스타로부터 중후함을 상상해보기란 쉽지 않았지만, 40대가 된 조인성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어느새 마초가 됐다. <밀수>가 보여주는 배우 조인성 활용 방식은 배우의 효율적 쓰임에 대한 긍정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월남에서 돌아온 무시무시한 권 상사를 연기한 조인성은 짧은 분량임에도 김혜수를 매번 긴장시키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후반부의 피 튀기는 액션에선 맑은 눈의 광인 역할에 충실한 채 극의 하이라이트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