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무서워하던 이가 <밀수>에 빠졌다. 류승완과 김혜수, 두 이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뭉친 막강한 팀으로 구성된 <밀수>의 해녀 활극은 동료들과 주고받은 경외감에 힘입어 염정아가 자신의 캐릭터 엄진숙을 더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물 밖에서도 매일 손잡고 같이 종종거렸던 해녀들과의 한철을 보낸 뒤, 염정아는 이제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사람이 됐다. 다음엔 또 무엇을 배우고 어떤 감정에 새롭게 빠져들지 모르는 일이라고, 1991년 데뷔 이래 언제나 뜻밖의 타이밍에 전성기를 누린 이 독특한 궤적의 배우는 유유히 전망했다.
언제부터인가 염정아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귀퉁이를 오려붙인 듯 미덥고 친근한 얼굴로 자리 잡았다. 고생깨나 한 여자들의 황폐한 표정을 그는 여러 번 살아본 듯 재현해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특유의 파리한 아름다움을 호러에 적용하거나(<장화, 홍련>), 예리하게 깎인 이목구비를 일종의 엽기적 면모로 치환하고(<여선생 VS 여제자>), 되바라지고 야생적인 캐릭터 안에 미스터리를 숨긴(<범죄의 재구성>) 시도로부터 ‘장르적 염정아’는 빛났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함께 그도 첫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염정아가 보여준 매력은 한국 영화산업이 여성배우에게 노출한 희귀한 예각의 지대였다. 이는 <이층의 악당> <타짜>에서 김혜수가 보여준 탁월함과 비견할 만하고, 또 다른 배우의 사례가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두 배우를 일찌감치 예견된 스크린 콤비라 불러볼 수 있겠다.
오늘의 염정아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배우의 분명한 변신을 방증하기에 더욱 감탄스럽다.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해고돼 노조 생활을 시작한 마트 직원 선희로 분한 것이 2014년 부지영 감독의 영화 <카트>다. 장르적 활력소였던 염정아의 코미디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연스러운 생활감과 인간미, 소시민적 억척스러움으로 쓰임새가 다변화됐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남편의 비밀에 속 끓이는 수현,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이른 나이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부 세연, 드라마 <클리닝 업>의 증권가 청소부 용미처럼 보통 사람들의 인생에 닥친 애처로운 시절에 배우 염정아를 대입하는 작품들이 늘어난 것이다. <외계+인> 1부의 삼각산 신선 흑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갑자기 와이어를 타고 거울 무술을 구사하는 이 낯선 캐릭터를 관객은 외려 <외계+인>에서 가장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였다. 모두 40대에 일군 변화다. 이후로 염정아를 향한 세간의 평가도 도회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라는 게으른 수식 대신 내색 없는 털털함 같은 종류로 바뀌었다.
그럴듯한 성공담 같지만, 직업인으로 견디는 시간도 그만큼 길었다. 1991년 <우리들의 천국>으로 드라마 데뷔 후, 2003년 디렉터스컷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까지 12년이 걸렸다. 2000년대 초반, 스크린 스타의 아우라를 인정받으며 ‘박스오피스 메이커’라 불렸지만 화려한 성적만 거둔 것도 아니다. <새드 무비> <오래된 정원> <내 생애 최악의 남자> 등 멜로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에서 감정의 진폭을 키우는 내공을 다졌고, 드라마 <로열 패밀리>에서 확인한 상류층 통속극의 적임자라는 가능성은 <SKY 캐슬>에서 터뜨렸다. 2019년, 대형 흥행을 예상하지 못했던 <완벽한 타인>이 신드롬을 일으킨 직후 <SKY 캐슬>이 정점을 찍으면서 육아 공백기 이후 기대하지 않았던 커리어의 새 정점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화려한 피날레를 즐긴 사람치고는 곧바로 <뺑반> <미성년> <시동>까지 담담하게 걸었다. <강철비2: 정상회담>의 ‘영부인’은 이 무렵 배우 염정아가 쌓은 우직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기능적인 여성 조연으로 잠식되기 십상인 역할이지만 염정아는 캐릭터에 실재하는 인간의 체중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지금 우리 곁의 염정아는 웃긴 것도 같고 무서운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은 배우다. <밀수>에서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시골 해녀 엄진숙을 연기할 때, 그는 영화적 정념으로 화사하게 빛나는 조춘자 역의 김혜수 옆에서 때때로 무채색이 되기를 자처한다. 상대역의 뜨거움에 맞서지 않고 그 열기에 오롯이 타버린 사람의 버석 마른 얼굴을 충실히 재현한다. 건드려야 할 재미가 너무 많아 감정이 끓는 점을 잠자코 지켜볼 새가 없는 영화 <밀수>가 거칠게 앞서나가는 순간에도, 관객은 엄진숙이 적시에 내민 손을 잡고 다시 배 위에 올라탈 수 있다. 문득 눈앞에 엄진숙이 아닌 염정아가 보일 때조차 감흥은 깨지지 않는다. 배우 자신은 ‘투톱 주연’ 수식이 당치 않다며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지만, 그럼에도 염정아가 여름 텐트폴 영화를 최전선에서 이끄는 두 여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점이 우리들에게 모종의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