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필연적으로 매번 새로워지는, 배우 염정아
2023-08-03
글 : 김소미
사진제공 아티스트컴퍼니

- 수영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물을 무서워하는 편이었다고. <밀수>를 선택하기까지 고민이 길었을 법도 한데.

= <밀수>는 하고 싶다는 마음부터 앞섰고, 그걸 그저 따랐다.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그 뒤부턴 그냥 ‘하면 되지’ 생각한다. 그리고, 하면 정말로 되더라.

-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몸을 새롭게 쓰는 일들이 많다. 뮤지컬 <인생은 아름다워>, 와이어 무협 액션을 시도한 <외계+인>, 해녀들의 리더가 된 <밀수>까지.

= 내게 책을 준 분들이 염정아의 새로운 가능성을 머릿속에 그려주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선물을 받아드는 기분이 든다. 내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감독님들의 안목을 믿는 것 역시 배우의 일이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욕심도 때론 동력이 된다.

- <범죄의 재구성> <전우치> <외계+인>을 함께한 최동훈 감독이 ‘몸 못 쓰는 배우’라고 현장에서 곧잘 놀리기도 했다던데.

= 감독님 진짜! (웃음) 근데 정말로 막연하게 내가 운동을 잘할 거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긴 하다. 전혀 아니다. 죽어라 연습한다. 그런데 이번에 <밀수> 시사에 최동훈 감독님이 오셔서 영화를 보고 나서 나한테 해준 첫마디가 “액션 잘하던데!”였다. 이제 인정받았으니 됐다.

- 1991년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와 이름을 알리기 전, 10대 시절부터 배우를 꿈꾼 소녀였다. 어릴 적 배우를 동경한 것도 매번 새로운 재능을 연마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 그땐 전혀 아니었다. 다짜고짜 저 일이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깜보>(1986)를 보고 박중훈 선배, 김혜수 선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지냈다.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때였지만 거울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 배우 염정아에게 <밀수>의 시골 해녀 진숙은 어떤 사람이었나.

= 흔히 말하는 리더의 덕목을 타고난 사람. 주변 사람들을 자주 살피고 책임감도 강한 여자다. 사고를 겪고 춘자(김혜수)와 헤어지기 전까진 시나리오에 표현된 것보다 좀더 개구쟁이 같은 면모를 살리고 싶기도 했다. 약간 소년적인 귀여움이 있었으면 했다. 어떤 면에선 아빠가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고지식한 면도 보이고.

- 이방인 춘자와 마을 토박이 진숙이 어떻게 만나 그처럼 돈독해졌을지 둘의 오랜 역사도 궁금해지는 스토리다.

= 혜수 언니와 늘 두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어렸을 적에 우리가 어땠고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를. 진숙이 해녀들을 이끌고 있지만 춘자와의 관계에서만큼은 편안한 친구나 자매, 혹은 서로의 분신 같은 모양일 거라 생각하며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그러니 춘자 혼자 도망갔을 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거다. 나한텐 그감정을 소화하는 것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시험이었다. 내내 ‘지금 이 장면에서 춘자를 향한 진숙의 마음은 어떻지?’ 하고 질문했다. 춘자가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조차.

- <밀수>의 조춘자가 영화적 정념이 강한 인물이라면 엄진숙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다. 관객도 자연히 진숙에 기대어 춘자를 바라보게 된달까.

= 춘자는 늘 사랑을 갈구하고 있으니까. 진숙은 돌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그 상반된 면모가 연기하는 우리에게도 자극을 줬다.

- 배우들 제각기 캐릭터 플레이가 돋보이는 데 반해 염정아의 엄진숙은 담담하게 극을 눌러주는 역할이 돋보인다. 의도한 결과인가.

= 어떤 영화든 진숙 같은 인물이 한명쯤은 꼭 필요하다. 튀는 매력으로 무장한 캐릭터들만 있을 순 없잖나. 누군가는 담백한 기조를 갖고 가야 하는데 스토리상 진숙이 그 역할을 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머리론 알지만 균형감을 유지한다는 게 매 순간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흔들리고 헷갈릴 때마다 류승완 감독님께 터놓았다. “지금 장면에서 진숙에게 이 감정은 몇 퍼센트, 또 이 감정은 몇 퍼센트예요?” 하는 식으로.

- 춘자가 떠나고 혼자 밀수죄로 감옥에 갇힌 진숙을 보여주는 감옥 시퀀스도 절제된 연기가 빛났다.

= 감옥 신이 <밀수>에서 내 첫 촬영 분량이었다. 최대한 눌러서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숙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때로는 배우가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고 절제하는 게 그 캐릭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식일 수 있다.

-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진숙이 춘자 앞에서 처음으로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 진숙의 감정이 처음 탁 하고 터져나오는 순간이다. 춘자에게 미안하고 창피한 마음, 아직 생생하다. 왜냐하면 직전까지도 진숙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세관 계장(김종수)한테 가서 정보를 흘리고 온 상황이니까. 온갖 감정이 복합적으로 휘몰아쳐야 했다. 사실 그 신은 시나리오상 동선도 복잡하고 대사도 많았다. 류승완 감독님과 혜수 언니, 나 셋이서 촬영을 앞두고 한참을 상의한 끝에 싹 줄였다. 감정과 눈빛에만 집중하는 편이 이 순간 두 여자가 지닌 감정의 깊이를 제대로 보여줄 것 같았다.

- 물속 팀워크가 필요했던 <밀수>에서 배우, 스탭 간 호흡을 맞추면서 각별했던 기억이 있나.

= 배우 한명에 선생님 한분씩 붙어 수중 액션을 지도해주셨다. 촬영하다 물속에서 너무 힘들면 각자의 선생님에게 사인을 보내는 식이다. 수중촬영은 특히나 언제 어느 컷에 내가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현장에 붙어 있어야 했다. 김혜수, 박준면 배우를 제외하면 모두 수영도 처음 배우는 판국이었으니 배우들끼리 애틋해질 수밖에 없었다. ‘쟤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란 마음으로 서로 박수치고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한번은 모든 스탭과 카메라가 물 밖에 있고 나와 혜수 언니만 물속에서 스탠바이 중이었는데 나는 언니의 눈을, 언니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로가 지금 편안한지, 준비는 잘되었는지 확인한 뒤 혜수 언니가 하나, 둘, 셋 신호를 주면 힘껏 발차기를 해 동시에 수면 위로 올라갔다. 그런 순간을 생각하면 요즘도 눈물이 핑 돈다. 언니가 눈빛으로 ‘나 믿지’ 하고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았다.

- <밀수> 무대 인사에도 두 사람이 자주 손을 꼭 잡고 나오더라.

= 나도 손잡는 거 좋아하는데 혜수 언니는 더 좋아해서. (웃음) 요즘 무대 나가기 전에 손 딱 잡고 나간다. 현장에서도 자주 손잡고 다니곤 했다.

- 스크린 배우로서 하나의 변곡점이었던 <장화, 홍련>이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았다.

= 세상에. (웃음)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지금의 염정아는 그 시절에 빚져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장화, 홍련> <범죄의 재구성> 같은 작품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긴 시간, 직업인으로서 느끼는 소회가 있나.

= 가끔씩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내가 참 운이 좋았다는 사실이 보인다. 실력 있는 배우들이 너무 많다. 나도 열심히 했지만, 그 과정에 운도 따라주었음에 항상 감사하려 한다. 사람은 계속 나이를 먹어가고 그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맡게 될 테니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옛날과는 또 다른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배우 일은 필연적으로 늘 새로워진다는 사실이 요즘 들어 더욱 재미있다.

- 도회적인 인상, 장르영화에 특화돼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역할에 제약이 있지 않은지 질문받곤 했다. 근 10년간의 필모그래피는 그런 우려에 대한 카운터펀치 같은 답변이 아닌가 싶다.

= 기쁜 말이다. ‘난 왜 자꾸 강하고 뾰족한 역할만 할까? 생활 연기가 하고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마음에 이런저런 조급함도 있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영화 <카트> 이후 나를 바라보는 업계의 새로운 순환이 생기면서 들어오는 작품의 결이 달라졌고, 그 다양성 속에서 나도 기다려왔던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 <완벽한 타인> <인생은 아름다워> <밀수> 등을 거친 지금, 이제는 과거의 갈증이 조금 해소되었나.

= 확실히! 그래서일까, 요즘엔 다시 아주 센 캐릭터를 해보고 싶단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또 새로운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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