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조의 안준호 이병이 일병이 됐다. 전 시즌에서 선임 한호열(구교환)에게 열심히 일을 배웠던 준호는 이제 새로 들어온 후임을 가르치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D.P.> 시리즈는 확연한 변화보다는 연속적인 시간 선상에서 새 시즌의 문을 열며 군대 조직의 유구한 병폐를 드리우는 작품이다. 어떤 변화는 있지만 극적인 분기점은 없는 상태로 문을 여는 <D.P.> 시즌2는 결국 준호로 대표되는 원자들의 작은 각성을 말한다. 극의 관찰자로서 균형을 잡으면서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용기를 연기한 정해인과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시즌1과 시즌2 사이에 시간 텀이 크지 않다 보니 오히려 변화를 크게 주지 않으려고 했겠다.
= 한두달, 길어봤자 몇 개월 지났을 거다. 봉디쌤 사건 이후 한두달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 딱 상황에 따른 변화다. 또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무뎌진다. 트라우마는 계속 남아 있지만 다이내믹한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계속 D.P. 일이 주어지다 보니 스트레스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 시즌1의 봉디쌤(조현철)이나 시즌2의 김루리(문상훈) 사건이 워낙 무거운 데다 시즌2 초반 에피소드는 시즌과 시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너무 폭발하듯 연기하면 2년 만에 <D.P.> 시리즈를 보는 관객은 과하다고 느낄 것이고, 그렇다고 덤덤하게만 연기하면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 기술적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연기하지는 않았다. 그런 계산적인 접근 방식보다는 준호가 놓인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를 계속 고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을 폭발시키며 살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일이라 덤덤하게 반응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좀더 정의롭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준호처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필요하다.
- 전 시즌에 비해 유머가 많이 줄었다. 요즘 시청자들은 너무 어둡기만 하면 보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요소를 어떻게 만들어나갔나.
= 감독님이 그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셨다. 결국 대중 예술은 보는 사람이 공감하거나 대리 만족을 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 <D.P.> 역시 작품 속 상황에 이입할 수 있다면 즐거움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D.P.> 시즌1의 5, 6회를 다시 본 후 시즌2를 감상하면 “왜 이렇게 딥하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웃고 떠들며 소비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유머 코드나 개그가 없이도 공감을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 <D.P.> 시리즈의 중요한 축 중 하나는 ‘준호열’의 이상한 케미스트리다. 시즌1에서 준호와 호열이 점점 가까워지는 관계였다면 시즌2에서는 좀더 편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갖고 있는 이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나. 준호와 호열도 서로 상대의 부족한 면을 갖고 있다. 시즌2에서는 두 사람이 점점 닮아간다. “어흥, 어흥”처럼 호열이 칠 법한 대사를 준호가 한다거나, 호열의 전사가 드러나면서 진지한 모습이 나올 때는 아마 준호와 겹쳐 보일 것이다.
- 기차, 주차장, 도심 한복판, 인천 부두 등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액션 신을 소화했다. 본인의 액션을 자평해보면 어떤가.
=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액션과 할 수 없는 액션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테이크를 많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갖고 있는 신체 능력을 넘어서는 연기를 하면 부상을 입을 수 있고, 프로덕션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지만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의 한계를 끝까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톰 크루즈가 목숨 걸고 하는 액션이 더 리얼한 것처럼, 잔꾀 부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를 더 늘려가고 싶은 도전 의식이 생긴다. 이런 부분이 참 딜레마다.
- 한준희 감독은 “액션이 멋지지 않길 바랐다”고 했다. 그런데 <D.P.> 시리즈가 추구하는 처절한 움직임 역시 액션 실력이 잘 받쳐줘야 구현될 수 있다.
= 아마 감독님의 말씀은 화려한 액션에 포커스가 가기보다는 액션을 행하는 사람의 감정을 보여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몸을 잘 쓸 줄 알아야 그런 연기도 할 수 있다. 신체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힘 조절도 가능하다.
- 어떤 이들은 <D.P.>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유발 드라마라고들 하지만 이게 단순히 고통을 하소연하고 끝나는 작품은 아니지 않나. 작은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가 잘 전달하려면 관찰자인 준호가 입체적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서 더 연기하기 까다로운 캐릭터다. 감정을 폭발적으로 터뜨리는 역할은 아닌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정확하다. 배우 입장에서는 “나 오늘 연기한 게 없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캐릭터다. 그리고 배우들은 감정을 쏟아부어 열연을 펼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준호에겐 그런 강력한 신이 없다.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안준호 캐릭터에 힘을 줘버리면 주객이 전도되어 작품이 망가진다. 무미건조한 연기를 하면 안되니 기술적인 조절도 필요하다. 그런데 군필자여서 그런지 매회 맞닥뜨리는 상황에 감정이입이 잘됐다. 탈영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이해가 갔다.
- 전작 <커넥트>에서도 그렇고 다른 배우를 받쳐주는 연기도 썩 잘한다.
= 나도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나. 그런데 연기는 주거니 받거니 해야지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어떻게 보면 리액션이 더 어렵다. 배우가 어떻게 리액션을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열연이 돋보일 수도 묻힐 수도 있다. 자기 대사가 없다고 긴장을 놓으면 안된다. 상대 배우를 예의 주시하고, 눈으로 잘 관찰하고, 귀로 잘 듣고, 피부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신을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저 배우 연기 잘한다”보다 “저 상황 진짜 같다”는 반응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다.
- 정해인과 구교환은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보인다. 두 시즌에 걸쳐 자신과 다른 유형의 배우와 호흡을 맞추면서 각자의 경험도 확장됐을 것 같다.
= 교환이 형은 굉장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연기하는 흥미로운 배우다. 예측이 안된다. 한 가지 연기만 열심히 준비하는 게 아니라 말랑말랑하게 사고하는 유연한 배우다. 실제로 내가 연기할 때 그때그때 다르게 리액션을 하기 때문에 탁구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같이 연기할 때 서로 주고받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형이랑 <D.P.> 시리즈 말고도 다른 캐릭터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 구교환 이외에도 매회 보석 같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다.
= 선배가 됐든 후배가 됐든 내게 여러 가지 피드백을 준다. 어떤 때는 많이 배우기도, 어떤 때는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연기하면 정말 재미있다. 사실 연기는 허구의 세상에서 거짓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진짜 세상으로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도, 거짓을 진짜라고 믿고 임해야 한다. 거짓인 세상을 거짓으로 연기하는 것만큼 최악이 또 있을까. (웃음) 매 순간, 한신, 한컷 찍을 때마다 이 불신을 없애고 최선을 다해 믿고, 상대방도 나도 믿으면서 해야 한다.
- 실제로는 운전병 출신이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돌이켜보면 어떤가.
= 군 생활 얘기는 원래 재미없다. 남자들은 다들 자기가 있던 부대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다. <D.P.> 촬영 현장에서 늘 열띤 토론의 장이 펼쳐졌는데, 엄밀히 말하면 2008년 군번이었던 내가 극 중 군대와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경험을 하지 않았나 싶다. (웃음) 디지털 군복으로 바뀌기 전 마지막 세대였고, 언론에도 노출됐던 가슴 아픈 사건들이 있던 시기였다.
- <D.P.> 시리즈 이후에 “정해인이 이렇게 거친 연기도 할 수 있다니 다시 봤다”는 반응이 적잖게 흘러나왔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갸우뚱한 반응이었다. 드라마 <봄밤>에서 보여준 멜로 연기보다 <D.P.> 시리즈의 그것이 더 어렵다거나 우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웃음)
= 공감한다. 그리고 감정적으로는 <봄밤>에서와 같은 멜로 연기가 내겐 더 어려웠다. (웃음) 취향상 멜로를 잘 보지 않던 분들이 <D.P.>를 통해 나를 처음 본 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특히 <D.P.> 이후에 남자 팬들이 많아졌는데, 나를 마주치면 “시즌2 언제 나오냐”며 너무 좋아해주셔서 감사하다.
- <D.P.> 시리즈에서 머리를 짧게 깎고 태닝을 하는 등 외적인 변신을 줘도 대중이 처음 좋아했던 매력 포인트, 이를테면 말갛고 청순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외모를 극단적으로 바꾸지는 않는다고 해야 하나. (웃음)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지만 과거 대중에게 소구했던 지점을 배신하지 않는 선은 어떻게 타고 있나.
= 배우는 쓰임에 맞게 연기하는 사람이다. 나의 예전 작품을 잘 봐주신 업계 관계자들이 정해인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이 무엇인지 발견해주신 덕분이 아닐까. 그리고 배우가 의욕 과잉으로 너무 욕심을 부리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내가 이런 연기를 잘할 수 있다, 하고 싶다는 과욕에 빠지면 정말 큰일 난다. 배우는 보여지는 직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관계자 분들이 내게 원하는 것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것은 전부 다를 것이다. 배우가 하고 싶은 것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 사이에 합의점을 찾아서 교집합을 선명하게 만들고 완만하게 넘어가야 한다. 서로간에 합의하에 함께 상승할 수 있는 합리적인 도전을 해나가고 싶다.
- 올해 4월 <베테랑2> 촬영을 마친 후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나.
= 데뷔 10년차인데 이렇게 오랫동안 작품을 안 하고 있는 게 처음이다. 사실 지금 작품에 들어가려면 2~3월에 결정했어야 했는데 <베테랑2>를 찍기도 벅차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예능 프로그램을 찍었고 11월까지 해외 팬미팅을 다니다 보면 올해가 끝날 것 같다. 빨리 재미있는 작품으로 촬영에 임하고 싶다.
- 이렇게 배우가 해외 팬미팅을 돌 수 있는 것도 넷플릭스의 힘이 아닐까. (웃음)
= 글로벌 OTT 넷플릭스 사랑해요. (웃음) 공교롭게도 넷플릭스에 내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올라와 있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게 아닐까. 신기하고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