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한국, 홍콩, 일본의 영화를 일별하는 순간 드는 의문 하나. 왜 이토록 많은 신체장애인들이 등장하고 있는가?” - 이영재, <아시아적 신체>
“‘한국’ 액션영화들은 (이미 서구 액션이 일본의 문맥에 맞추어 번역된) 일본 활극과 ‘제임스 본드’ 시리즈, 홍콩 액션들로 붐비는 문화 횡단의 콘택트 존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식민, 반(半)식민, 그리고 포스트 식민의 콘택트들이 만들어낸 복합적 형상이다.” - 김소영, <근대의 원초경>
류승완의 <밀수>는 불구가 된 몸들로 가득하다. 해녀들을 이끄는 선장인 진숙 아버지(최종원)의 한쪽 다리가 그물에 묶인 채 어선에 빨려 들어가 죽는 사고를 기점으로 이 영화의 화면에는 다양한 신체장애의 형상이 침입하기 시작한다. 오른팔에 갈고리를 의수로 단 장도리의 졸개, 한쪽 눈에 안대를 쓴 권 상사의 부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억척이 부부에 이르기까지…. <밀수>가 그려낸 70년대 군천이라는 가상의 공간적 배경은 외팔이와 외다리와 애꾸눈으로 채워진다. 질문은 오랜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 왜 이토록 많은 신체장애의 도상이 등장하게 됐는가? 이 몸들이 비교적 현실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진 초반부를 끝내고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넓어지면서 시작되는 장르적 과잉의 무대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조연들이지만 류승완이 구체적으로 선별한 신체장애의 몸에 깊이 주목하고 싶다. <밀수>에서 그 몸(들)은 순도 높은 장르적 활극으로서 영화가 실천하려는 것과 그 장르의 틀 안에 남아 있는 류승완적 캐릭터가 간직한 딜레마가 충돌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액션영화의 신체
류승완의 액션영화는 인물의 몸이 날카로운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리거나 몸과 몸이 둔탁하게 부딪쳐 관절이 부러지는 묘사에 익숙하지만, 신체 한 부분이 잘리는 순간이나 절단된 상태에 매혹된 적은 드물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자리에서 두 눈이 뽑히고, <짝패>에서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형벌을 당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류승완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들이다. 이 점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류승완은 신체가 잘려나가는 표현 자체를 금기시하는 연출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한 배역의 눈과 손을 훼손할 뿐 다른 배우들의 절단된 신체를 묘사하는 데 일정한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신체 일부분이 잘려나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감독이자 배우로 출연하는 자신에게 주어지면 된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대를 재현한 역사물이라면 일본 군인의 목을 자르거나(<군함도>), 만주 마적단 두목을 안대 낀 애꾸눈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것(<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 허용되지만 현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를 만들 때 류승완의 이 원칙은 더욱 견고해진다.
요컨대, 류승완이 배우에게 부여하는 캐릭터의 몸은 부러지고 찢어지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회복 가능성을 간직하는 몸이다. 달리 말하면 붕대를 감은 몸이다. <다찌마와 리>에서 단기기억상실증으로 정체성을 잃은 다찌마와 리(임원희)는 한쪽 손이 잘리는 대신 상처 입은 손에 붕대를 두르고 외팔이 액션을 선보이며 액션 영웅으로 귀환한다. 누구나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베테랑>의 배 기사(정웅인)와 <밀수>의 권 상사(조인성)는 그러나 다친 부위에 붕대를 두른 모습으로 기적처럼 살아난다. 그러므로 붕대를 감은 주먹을 상대의 몸에 작렬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하는 <주먹이 운다>의 두 남자는 류승완이 구축한 한 가지 남성 캐릭터 유형의 원점으로 고려할 만하다. 그들의 몸은 망가졌고 앞으로 더 망가질 일만 남았지만 서로를 향해 주먹을 뻗어 두 몸이 맞닿는 사각의 링 안에서 잠시나마 굴욕과 상처를 잊는다.
류승완은 가상의 70년대를 창조하면서 붕대로 감싸 회복 가능성에 열려 있는 몸 대신 외팔이, 외다리, 애꾸눈 같은 불구의 몸을 가지고 온다. 그것은 류승완식 액션영화가 추구하던 신체, 현실의 중력을 견디며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신체가 아니라 70년대 한국 액션영화에 출몰하던 신체장애의 형식을 빌려 향수 섞인 장르적 무대로 진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밀수>의 배경에 관해 “영화를 만들면서 지금까지 배경을 가상의 도시로 설정한 것은 <짝패>와 이 영화(<밀수>), 두개가 있다. ‘이것은 장르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일종의 안내”라고 말한다. <밀수>가 꾸며낸 밀항 도시는 이야기가 설정한 시간대에 맞춰 70년대 액션활극영화의 신체장애를 불러들이는 장소가 된다. 홍콩 <독비도>와 일본 <자토이치> 시리즈의 아시아적 유행을 타고 무수히 생산되던 한국형 신체장애 활극의 기억이 그 안으로 밀수되는 것이다. <아시아적 신체>에서 거론하는 이영재 평론가의 정교한 분류를 다시 ‘밀수’하자면, “외팔이 이대엽의 <대검객>, 애꾸눈 박노식의 <애꾸눈 박>, 외다리 한용철의 <속 돌아온 외다리> 등등”의 기억이 그것에 열광을 바치던 류승완이라는 다음 세대 감독을 매개로 스크린에 돌아온다.
대부분의 신체장애 활극이 장애를 극복하고 전보다 강한 힘을 얻는 남성 영웅의 귀환으로 끝나는 것처럼, 70년대적 기억의 귀환은 <밀수>와 류승완을 새로운 액션의 지대로 향하게 할까? 그러나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불러들이는 신체장애의 형상은 액션 활극 장르의 규칙에 포개지지 않고 어긋난 균열을 드러낸다. <밀수>에서 손상된 몸(들)은 그 기원과 무게감이 각자 다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장도리 졸개의 갈고리는 오직 장르의 분위기를 강화하는 소품이자 액션 시퀀스의 변주를 위한 도구로 쓰인다. 월남전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권 상사 부하의 애꾸눈 또한 희미하게나마 장애의 역사적 기원을 환기하지만 역시 시각적 기호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신체의 결핍으로 고통받은 흔적이 없다. 하지만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상어가 출몰하는 바다에서 해산물을 캐내다 한쪽 다리가 잘리는 억척이의 몸은 이와 다르다. 상어에 의해 다리가 잘린 해녀의 몸은 신파극의 사연(‘다리가 잘린 해녀’)과 장르적으로 과장된 위협(‘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상어’)이 교차하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부정교합을 예시한다.
<밀수>에서 류승완은 동시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규율과 누추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활극의 시간에 진입하려 들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온전히 장르의 무대에 귀속될 수 없는 성격의 연출자다. 그가 창조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액션 영웅의 호방한 몸짓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통증과 비루함이 있다. 이 영화에서 그 통증과 비루함을 전하는 것은 해녀들과 다방 주인 고옥분(고민시)의 몸이다. 류승완은 상처 입고, 고통받고, 장애를 갖게 된 그녀들의 몸을 활극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적인 재현을 신경 쓰기보다는 장르의 세계가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 <밀수>의 공간에서조차 현실의 통증은 기각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류승완은 권 상사가 입원한 병실에 찾아가는 조춘자(김혜수)의 걸음을 빌려 활극의 승리를 선언하지만, 억척이(주보비)의 잘린 몸은 화면에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재건도 없다.
조춘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밀수>의 가장 커다란 승리자는 물론 조춘자일 것이다. 춘자는 능숙한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해 준비한 계획을 성공시키는 뛰어난 연출자이자 수많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유능한 중재자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완벽한 계산과 세팅으로 사건을 진척하는 것은 물론, 해녀들과 묵은 오해를 청산하고 진숙(염정아)이 빼앗긴 아버지의 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우며 장도리와 이 계장(김종수)이 결탁한 마을의 나쁜 질서를 응징하는 결말까지도 성취한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온 인물일까? 모든 것을 계획하고 문제 없이 실행하는 춘자는 <밀수>에서 가장 많은 설명이 동원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설명하기 까다로운 캐릭터다.
춘자와 진숙 일행이 금괴를 밀수하다 세관에 붙잡히는 사건 뒤로 2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에게 그 이전의 과거사를 부여하는 것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2년 전과 후로 급격하게 바뀌는 인물들의 변화가 가장 강력한 서사적 변주이기 때문이다. 춘자만이 유일한 예외다. 춘자의 과거는 자신의 입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세 차례나 전해진다. 그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어린 나이에 군천에 굴러들어 14살부터 식모살이를 하면서 강간당할 뻔한 위기에서 가해자를 칼로 찌르고 도망쳐 해녀가 되었다고 한다.
10대부터 시작된 식모살이와 강간당할 뻔한 상황에서 남자를 찌르고 도망쳤다는 춘자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인물에게 주어진 과거사를 초과해 70년대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또 다른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시골에서 상경해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다 주인집 아들에게 강간당하고 거리에 내쫓기는 <영자의 전성시대>(1975)의 영자의 이야기다. 물질이 끝날 때마다 배에 올라타 “오라이!”를 외치며 술집에서 가발을 벗고 감상에 젖는 춘자는, 버스 계단에 위태롭게 서서 “출발!”을 외치며 술집에서 일하는 도중 희롱당해 가발을 벗는 영자의 다른 버전이다(춘자를 연기한 김혜수는 이런 역할의 뉘앙스를 재현할 수 있는 마지막 충무로 ‘스타’일 것이다). 만약 춘자가 군천에 굴러들어오는 대신 서울로 향했다면 영자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따랐을 것이다. 류승완이 구축한 70년대 군천은 외팔이, 외다리, 애꾸눈을 불러오기 위한 활극의 무대장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주인공을 위해 설정된 다른 기회의 장소이기도 하다. 조춘자는 1970년대에 서울로 상경한 어린 식모들의 무덤에서 걸어 나온,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실현되지 않은 꿈이다. 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류승완은 활극영화의 기억을 끌어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밑바닥에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공통적 기억을 배양한다.
<밀수>와 <영자의 전성시대>를 연결짓는 근거는 춘자와 영자가 공유하는 서사적, 도상적 공통점에 한정되지 않는다. 영자는 더 넓은 차원에서 <밀수>에 접속한다. 영자 역시 한쪽 팔이 잘린 불구의 신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식모로 일하다 쫓겨난 영자는 버스 안내양으로 근무하던 중에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는다. ‘외팔이’가 되는 영자의 몸은 산업화에 휩쓸린 남한 사회의 가혹한 질서가 강요한 또 다른 신체장애의 형상이다. 한쪽 다리가 잘려나간 억척이의 몸처럼, 위험에 무방비한 환경이 뱉어낸 노동자의 몸이다. 그러므로 <밀수>가 끌어들이는 신체장애의 형상은 조금 더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밀수>는 활극적 장르의 기호로 주어지는 잘린 몸과 여성적 노동의 증거로 주어지는 잘린 몸의 대립을 내세운다.
류승완과 류승완 바깥의 것들
권 상사는 춘자와 처음 대면하면서 대뜸 묻는다. “나 알지?” 그런가 하면 군천에 돌아온 춘자는 진숙과 재회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나 모르냐?” <밀수>의 인물들은 이미 무언가 알고 있거나, 아직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 권 상사의 질문이 액션 활극을 예고하는 남성주의적 관습의 한 단면이라면 춘자의 대답은 두 여성의 끈끈한 멜로드라마적 관계를 불러온다. 그들의 서로 다른 문답은 서로 다른 몸(들)이 배합된 이 영화의 형식을 예고한다. 말하자면, <밀수>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류승완과 우리가 몰랐던 류승완이 대립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한쪽의 류승완은 범용한 장르의 규칙에 순응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른다. 다른 한쪽의 류승완은 여전히 한국영화가 시도할 수 있는 액션과 한국의 캐릭터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관계를 탐색한다.
<군함도>가 일으킨 영화 안팎의 커다란 논쟁을 겪은 후로 류승완은 연출가로서의 자의식을 배제하고 오락영화가 제공하는 쾌감에 몰두해야 한다는 뒤집힌 강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이 숨겨둔 자의식은 언제나 완벽하게 감춰지는 대신 스크린의 표면 밑으로 슬며시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밀수>는 특별할 것 없는 범작이지만 철저히 장르적인 활극의 무대와 이에 완벽하게 융화되지 않는 인물들의 감상주의적 정서가 불화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기억할 만한 사례다. 능숙하게 무기를 다루고 불한당을 마음껏 해치우는 70년대 액션 아이콘들과 다르게 류승완이 창조하는 캐릭터는 연민과 염치라는 단단한 감정의 닻에 붙들려 있다. 가장 파렴치한 악당으로 나오는 장도리조차 세관 직원의 시신을 유기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옥분의 시선을 피하고, 해녀들에게 바다에 빠지라고 협박하면서도 진숙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활극의 악한도, 할리우드풍의 장르적 악인도 될 수 없다. <밀수>에 관해 말하는 적잖은 이들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을 거론하지만, 류승완은 결코 타란티노처럼 ‘사슬 풀린’ 응징의 쾌감을 제공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진숙과 춘자 역시 바다에 빠진 장도리를 총으로 쏘지 않는다. 악인을 처치하는 것은 류승완의 주인공들이 수행해야 하는 관문이 아니며, 앞서 언급했다시피 장도리는 해치워봤자 속 시원한 쾌감을 주는 대상도 아니다. <밀수>는 이 문제를 내적 조건 안에서 해결하지 않는다. 이를 대신 해결하는 것은 한국영화가 창안한 이미지 바깥에 놓여 있는 식인 상어의 출현이다. 상어는 서사 안에서는 해녀들이 물질하는 영역 바깥에 머무는 대상이고, 이야기의 범주를 넘어서 본다면 ‘한국의 70년대’라는 시공간적 배경 바깥에서 찾아온 낯선 대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7)를 단박에 떠올리게 하는 그 대상은 70년대 미국이라는 장르적 이상향의 무대에서 ‘밀수’된 이질적인 존재다. <밀수>의 바다는 70년대 한국영화의 표면은 물론 국가를 넘나드는 영화사적 기억을 향해 열려 있지만, 그렇게 결합된 허구의 영화적 장소가 자아내는 곤경을 애매하게 회피한다. 70년대 영화에 깊은 애정을 드러낸 바 있는 연출자가 최초로 그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음에도 <밀수>가 전제로 하는 시공간은 류승완을 위해 세워진 영화적 무대가 아니다. <밀수>는 그럴듯한 장르영화고, 같은 의미에서 실패한 류승완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