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인간 군상 풍자극”에서 “아포칼립스 스릴러”까지,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2023-08-11
글 : 송경원

엄태화 감독은 동전의 경계 위에 선 창작자다. 그는 인간, 공간 나아가 사물의 양면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잉투기>에선 디지털 공간이 젊은이들의 도피처인 동시에 그들이 타락해가는 곳이었고, <가려진 시간>에선 시간이 멈춘 공간의 이중성을 그렸다. 세 번째 장편이자 가장 큰 예산이 투입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모순 속에서 의미를 탐색하는 엄태화 감독의 특질과 시선은 변함이 없다. 아니 외려 한층 깊어졌다. 대지진 발생 후 유일하게 남겨진 콘크리트 덩어리가 어떻게 하면 ‘즐거운 나의 집’을 외치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블록버스터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는지 묻자 그는 살짝 들뜬 소년의 얼굴로 답했다. “<대부>의 제작 과정을 그린 드라마 <오퍼: 대부 비하인드 스토리>를 재밌게 봤다. 거기서 존 포드가 자신을 위한 영화를 하나 찍고, 모두를 위한 영화도 한편 찍으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있다. 나를 위한 영화는 뭔지 알겠는데 모두를 위한 영화는 아직 모르겠다. 그걸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찍었다.” 천국과 지옥의 경계가 무너진 회색빛 세계에서 엄태화 감독이 발견한 보물들, 모두를 위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 언론 시사 후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 의도가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지만 아직 일반 관객들을 만난 건 아니라 조심스럽다. 여름 시장에 선보이기엔 다소 어둡고 무겁다는 우려의 말도 들었다. 하지만 전개 과정에서 영화적 재미가 확실히 전달될 거라 자신한다. 웹툰을 영화화하면서 첫 번째로 공들인 건 현실적인 톤, 리얼함이었다. 절대 세트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고 실제 공법으로 아파트를 3층까지 지었다. 진짜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게 중요했다.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가 진짜와 다름없다고 받아들인 다음에 예측하기 힘든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영화의 재미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의미와 메시지가 빠질 순 없지만 거기에 다다르는 즐거움과 재미라는 과정 또한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다.

- 결과적으로 감정이입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세팅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 과정의 서스펜스, 둘 다 제대로 성취했다.

= 감사하다. 현실이 아닐수록 더 현실적인 설정들이 필요하다. 가령 황궁 아파트는 각 호수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모두 구상했다. 24평형에 사는 사람들과 32평형에 사는 사람들이 미묘하게 다르다. 자료 조사부터 소품 하나까지 물리적으로 긁어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긁어모았다. 배우들도 모두 연기 잘한다고 소문난 분들을 한분 한분 모셨다. 반상회 장면에서 각호에 사는 주민들의 구체적인 사연을 부여하고 한자리에 모았더니 진짜 그 사람이 할 법한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나는 주로 콘티를 꼼꼼하게 따라가는 스타일인데 그 장면은 모든 앵글을 마스터로 찍었다. 그 장면만 이틀 정도 찍었는데 진짜 연극 무대에서와 같은 배우들의 생생한 호흡을 보며 묘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 황궁 아파트의 입지도 재미있다. 산자락 아래 오래전에 지은 듯 보이는 황궁 아파트는 새로 지은 드림 팰리스에 둘러싸여 있어 적지 않은 차별이 있었을 것 같은데.

= 일단 지진이 났을 때 어떻게 아파트 한채만 남을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허무맹랑한 설정을 비주얼로 한컷에 이해시키고 싶어서 여러 장소를 로케이션하며 참고했다. 그중 부산 사하구 당리동에 산 바로 밑에 지은 아파트가 있었는데 직접 가서 보니 이런 위치라면 산이 지진을 막아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강에서 너무 떨어져 있는 건 원치 않아 약수 인근에 남산을 끼고 있는 아파트로 생각하며 입지를 정했다. 실제로 일대 지형을 스캔해서 가능성 여부를 시뮬레이션 한 끝에 지금의 형태가 완성됐다.

재난 속의 낙원

- 김숭늉 작가의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했는데, 제목은 박해천 작가의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따왔다.

= 처음 원작을 봤을 때 흥미롭게 다가온 건 재난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름의 낙원을 꾸미려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개인적으로 재난물에서 희망을 보여줄 때 늘 어딘지 가짜 같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김숭늉 작가의 원작은 단지 희망이라고 말할 순 없는, 마치 원시사회로 돌아가는 듯한 이중적인 모습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박해천 선생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을 때 내가 느꼈던 아이러니를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단 가제로 달았는데, 끝까지 이것보다 더 좋은 제목을 찾을 수가 없었다.

- 이신지 작가와 함께 각본을 썼고 각색 조슬예, 윤색 정승오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각색 과정에서의 고민이 느껴진다.

=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여러 버전을 두고 정말 고민이 많았다. 지금의 엔딩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심 끝에 정했다. 막연한 희망과 낙관은 애초에 배제했지만 사실적이고 납득이 되면서도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고 싶진 않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쩌면 이게 무슨 희망이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 같다. 상대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연민, 척박한 상황에서도 손 내밀어줄 수 있는 작은 너그러움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답을 찾는다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같은 개념으로 나눌 수 없는 것들, 그러니까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권선징악보다는 인과응보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겠다. 회색빛 콘크리트로 가득 채워진 세계에서 하얀 쌀밥의 온기가 전해주는 정도의 희망을 남기고 싶었다.

- 원작 웹툰과는 전개나 시점이 많이 다르다. 원작이 학생 혜원의 이야기라면 영화는 신혼부부인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 엔딩만큼 시작점도 고민이 많았다. 원작에선 혜원(박지후)이 아파트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혜원을 주인공으로 6고까지 썼다가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을 조금 뒤로 물러나게 한 뒤 전체를 새로 썼다. 황궁 아파트는 어떻게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되었는지 과정을 그려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여러 캐릭터 중 신혼부부를 이야기의 화자로 택했다. 말하자면 이건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이고 제목 그대로 콘크리트가 거짓 유토피아가 된 세계에서 출발한다.

-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모한 역사를 몽타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 인상적이다. 경쾌하면서 아이러니하다.

= 아파트의 역사를 짧게 보여주고 싶어서 KBS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팀에 연락했다. 이태웅 PD님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 책의 핵심을 영상으로 옮겨보고 싶다고 했더니 방대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축약해주셨고 지금의 오프닝이 탄생했다. 그렇게 아파트가 이상향이 된 세계를 소개한 후 지진으로 모든 걸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된다.

- 아파트 정비 사업 몽타주는 마치 아파트 광고영상처럼 찍었는데 웃기면서도 섬뜩하다.

= 아이러니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에피소드를 줄여야 할 때 거꾸로 아이러니한 면모를 부각할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덜 보여주고 짧게 보여줄 때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지점도 있다. 특히 영탁 역의 이병헌 배우가 무거운 분위기에서도 씁쓸한 웃음, 블랙코미디를 위한 특유의 호흡을 잘 살려주셨다. 판타지 속 유머를 전할 때도 리얼함을 잃지 않는 선을 지키고 싶었다.

- 그 밖에도 주변 지도로 수색 영역을 확장하는 장면 등 강렬하고 간결한 몽타주 장면이 많다.

= 워낙에 이야기가 방대해서 축약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축약하되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수색팀이 아파트 바깥을 수색하는 장면은 원래 에피소드가 더 많았는데 흐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줄였다. 에피소드가 줄어도 인물의 입체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이 많았다. 최소한의 장면을 통해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게 일관된 목표였다. 처음 해보는 큰 규모의 예산이었지만 돈이 모자라는 건 늘 똑같더라. (웃음)

지진의 스펙터클, 배우의 스펙터클

- 빠질 수밖에 없어서 아쉬운 장면를 고른다면.

=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다. (웃음) 그래도 하나 꼽자면 민성과 명화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황궁 아파트로 오게 됐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못했다. 너무 아쉬워 마케팅팀에 요청해서 민성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거기에 민성이가 행복했던 시절, 데이트했던 추억 등을 업로드할 계획이다. 준비한 소품 사진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이렇게라도 보여주려 한다. 영화 보러 오시기 전에 민성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오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워낙에 많은 인물과 에피소드들이 있어서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어울렸을 거 같다.

= 나도 이야기를 축약하고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빼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시리즈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이고, 만들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가 되었을 때라야 가능한 것들이 있다. 규모나 물량의 문제와는 다르다. 가령 배우의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은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 영탁이 <아파트> 노래를 부르며 플래시백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의 클로즈업 역시 탁월하다.

= 감사하다. 나도 그 장면에서 이병헌 배우를 보며 연기만으로도 가능한 스펙터클이 이런 거라고 새삼 실감했다. 플래시백을 쓸 때는 고민이 많은데 이번 영화에선 앞뒤 연결에 좀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가령 민성의 플래시백에서 지진의 스펙터클과 연결시키고, 영탁의 플래시백에서 직접 얼굴의 스펙터클에 집중하는 식이다. 클리셰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에 재난이 나오지만 재난영화는 아니길 바랐다. 영탁의 <아파트> 열창을 기점으로 영화의 톤이 바뀌는데, 전반부가 인간 군상 풍자극이라면 후반부는 좀더 전형적인 아포칼립스 배경의 스릴러에 가깝다. 색을 중심으로 보자면 블루나 그레이 톤으로 시작된 영화에 점점 레드가 더해지는 구성이다. 차가웠다가 점점 뜨겁게, 어쩌면 조금은 따뜻하게.

- <즐거운 나의 집> <아파트> 등 의미심장한 노래들이 적재적소에 쓰였다.

= <아파트> 가사를 보면 멜로디와 달리 슬프고 애잔한 면이 있다. 그런 모순적인 면들이 더욱 풍성한 해석과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 혜원이 부르는 버전의 <아파트> 노래가 나온다. 영탁의 <아파트>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시면 좋겠다.

- 아파트 밖 노숙자 패거리 중 하나로 동생인 엄태구 배우가 나온다.

= 섭외 과정은 별거 없었다. 너 이거 해줘, 알았어. 그게 끝이다. (웃음) 총 두번 나오는데 처음은 아파트 원정대가 식량을 구해올 때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들 무리가 마치 바퀴벌레처럼 흩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엄태구 배우 혼자 나온다. 원래는 세번 나와야 하는데 분량상 셋 중 한번을 삭제했다. 러닝타임이 130분 안으로 들어오는 게 상영 회차 차이가 크다고 들었다. 나중에 스트리밍으로 서비스할 땐 꼭 다시 넣어달라는 조건을 달아 마지막 편집 때 뺐다. 살짝 뮤지컬 같은 느낌을 상상했는데 <맥베스>에 나오는 유령들 같은 존재다. 진짜 지옥은 어디인가. 진짜 끔찍한 건 무엇인가. 수직이던 아파트가 수평이 되는 것처럼 역학 관계를 뒤집어보고 싶었다.

- 지진이 왜 일어났는지 세상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딱히 설명하지 않는다. 한편으론 모든 상황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다.

= 가능하면 원작을 보기 전에 영화를 먼저 보셨으면 좋겠다. 물론 원작을 본 분들도 원작에서 다루지 못한 전사(前事)를 확장했으니 흥미롭게 즐기실 수 있을 거다. 다만 이번 영화에선 지진이 왜 일어났는지 등의 세계관을 다루고 싶은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명쾌하게 설명되고 나뉘는 세상은 왠지 지루하고 어딘가 무섭지 않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미 일어났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건 그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선택이다. 이 영화에는 뚜렷한 안타고니스트가 없는 것 같다. 누군가는 영탁의 입장에서, 누군가는 민성이나 명화의 입장에서 영화를 따라갈 수도 있다. 실제 현실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고 내가 알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다. 한편의 영화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때론 그 미진하고 아쉬운 공백들이 영화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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