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딱 두 발짝 앞서가보자”, 변승민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대표
2023-08-11
글 : 김소미
사진 : 최성열

수백억원대 텐트폴 영화일수록 작은 시도가 큰 차이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그 한끗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제작진의 뚝심과 설득의 과정을 궁금하게 만든다. 편집의 리듬, 캐릭터의 감수성, 장면화 방식 등에 있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창작의 역량을 지지한 제작자 변승민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대표의 안목 역시 돌아보게 한다. 클라이맥스스튜디오는 2018년 레진스튜디오로 출범해 2021년 클라이맥스스튜디오로 사명을 변경, 현재 SLL(스튜디오 룰루랄라) 소속 레이블 중 단연 장르의 명가로 주목받고 있다. NEW 공채 1기 배급팀과 투자팀, 워너브러더스 한국영화팀장을 거쳐 스튜디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변승민 대표의 궤적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지형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리즈 <지옥> <D.P.> 등으로 부상한 그는 올해 더욱 거침없는 행보에 나섰다. 2023년 클라이맥스스튜디오의 라인업은 1월 넷플릭스 영화 <정이>로 시작해 3년 만에 나온 <D.P.> 시즌2, 극장 개봉작 <소울메이트>에 이어 야심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방점을 찍고, 하반기 공개될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로 완성된다.

- 성수기 여름 시장에 극장영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OTT 플랫폼 시리즈로 넷플릭스 <D.P.> 시즌2가 동시에 출격하게 됐다.

=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모든 기사와 댓글까지 다 찾아보고 있어 검색 능력이 엄청나게 발달하고 있다. (웃음) 전문가와 평단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때론 가장 말초적인 반응들, 보편적인 리액션 속에서 대중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시기별로 가늠해 나간다. 관객 반응을 정확히 캐치하는 것도 제작업의 중요한 근간이라고 본다.

- 엄태화 감독과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처음 함께 작업했는데.

= <숲>이 엄태화 감독 단편영화의 화룡점정을 찍기 전부터 감독님을 오랫동안 좋아했다. 독특한 유머, 회화적인 장면 연출, 특히 자기만의 관점을 갖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한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편 데뷔작 <잉투기>에도 그런 장점이 그대로 살아 있지 않나. <가려진 시간> 역시 첫 상업영화를 하면서도 뚝심 있게 자기 세계를 지켜간 지점이 보인다. 그를 처음 만나 협업을 논의할 때 나는 감독님이 더 큰 세계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 스릴러 장르 자체가 갖고 있는 어두운 색채, 그리고 주제적 깊이감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자칫 무겁게 비칠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핵심은 어디까지나 재미있는 영화, 심지어는 일면 웃긴 영화다. 단순히 규모가 큰 영화가 아니라, 볼거리 자체가 많아서 큰 영화여야 했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그런 부분을 인지하고 엄태화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한 디테일, 그리고 블랙코미디적 감수성이 극대화되어 작품과 시너지 효과를 내길 바랐다.

- 텐트폴 영화라고 해도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완전히 표백되지 않은 지점이 돋보였다. 제작자로서는 어떤 입장을 고수했나.

= 감독님이 작업실에 <게르니카>(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떠올리며 그린 추상화.-편집자)를 붙여둘 정도로 형식미에 대한 의지가 뚜렷한 점을 엿볼 수 있었다. <7인의 사무라이>가 화면에 군중을 담을 때 사람들이 어디에 어떻게 서고, 앉아 있는지 그 구도 하나만으로 많은 감정과 관계도를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흐르는 영상이지만 그중 한 장면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회화적 완성도가 있도록 접근하는 감독의 스타일을 믿고 갔다. 제작자로서는 굉장한 작업이 되겠다는 설렘과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각오를 동시에 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 <D.P.> 시리즈는 쇼트케이크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BH엔터테인먼트가 공동제작으로 참여했다. 공동제작 파트너십의 좋은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아무런 설명 없이 우선 시나리오만 보냈을 때부터 이병헌 배우가 일찌감치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다층적인 뉘앙스를 정확히 읽어줬고, 한국 남자배우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제안받고 검토하는 인물 중 하나인 그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손석우 BH엔터테인먼트 대표 역시 회사의 모든 배우들을 출연시키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에 환호했다. 훌륭한 배우가 다수 포진한 회사에서 보내준 지지가 정말 고마운 한편 내가 먼저 “너무 무리하진 마시라”라고 말렸다. (웃음) 튼튼한 배우들의 울타리는 제작을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에 합이 맞았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위해 지은 3층 건물은 단일 세트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그외 프로덕션의 완성도를 위해 과감히 투자한 부분이 있다면.

= 한장 한장의 그림을 보는 재미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시각적 재미를 위해 추구한 목표였다면, 이를 위해 우선 빛을 철저히 통제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파트 옥상을 돔구장처럼 감싸서 하늘을 덮는 지붕을 만들었다. 프로덕션 진행 중 예산이 가장 많이 증대되고 여러 제반 여건이 필요한 부분이라 최후의 결정을 앞두고 엄태화 감독과 조형래 촬영감독에게 재차 필요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과 비용 안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두분 다 빛을 우선순위로 삼더라. 독한 사람들이다. (웃음) 내 역할은 그 결정을 지지하면서 나머지 여건을 다시 효율적으로 조정해나가는 거였다. 폭염 속 촬영에 하늘을 덮으니 비닐하우스처럼 온실효과가 생겨 배우와 스탭들이 고생깨나 했다. 의외의 이점이라면 그해 여름 기후변화로 엄청나게 폭우가 왔지만 돔 덕분에 스케줄을 미루지 않고 촬영을 마칠 수 있었던 것?

-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스릴러로서 장르적 스펙터클을 추구하지만, 엔터테이닝 영화가 취할 법한 1차원적 선택들을 마냥 흡수한 영화도 아니다. 가령 <범죄도시>의 흥행 요인과 비교하자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감정적으로 복합적이고 결말도 일면 차가운 데가 있다. 제작자로서 위험부담으로 느끼지는 않았나.

= 어느 순간 신파 코드에 대한 불호가 강해지면서 덩달아 감정을 밀도 있게 들여다보는 영화적 시도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관객이 극장에서 항상 통쾌함과 웃음만을 바라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본다. 한편 우리는 영화에서 강렬한 파토스, 쏟아붓는 감정을 대리체험하길 원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시청각적인 재미와 더불어 영화적으로 집중해야 할 인물들의 극적인 감정들 역시 오롯이 지켜가려는 밑그림 위에서 완성된 영화다. 제작자로서는 줄을 당긴다고 생각한다. 감독과 제작진이 가진 비전에만 치중해 대중과 너무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줄을 끌어당기기만 하면 줄은 끊어지고 말 테다. 이때 가장 강한 탄성과 강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자리를 찾아가는 게 제작사의 역할이다. 엄태화 감독님과 자주 했던 이야기가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나아갈 수 있다면 딱 두 발짝 앞서가보자는 거였다. 그럴수록 설득력 있는 배우의 존재도 중요해진다. 관객이 넉넉히 믿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배우들이 이런 시도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김도윤, 박지후 배우 모두가 우리 영화의 품을 넓혀준 얼굴들이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시작으로 대지진 이후의 붕괴 설정을 근간에 둔 영화·시리즈들- <마켓>(가제, 홍기원 감독) <황야>(허명행 감독), 시리즈 <유쾌한 왕따>(민용근 감독)- 이 제작되고 있다. 과거 인터뷰에서 이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부를지, 혹은 ‘느슨한 연대’ 정도로 볼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지금 단계에서 어떻게 정의하나.

= 심플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고민 중이다. 궁극적으로 작품이 중요하지 용어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이유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비롯한 할리우드가 정착시킨 세계관의 의미가 따로 있고, 그것이 이미 특징적인 영화 관람 문화를 형성하고 있어서다. 클라이맥스스튜디오의 작품들은 톤 앤드 매너가 일관되게 유지되거나 작품별로 순서를 배열할 수 있는 식의 세계관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각 영화·시리즈가 통일성에 얽매이지 않고 개별 프로젝트로서 고유한 컬러를 지닌다.

- 원작 단편영화를 긴 시리즈의 오프닝으로 삼은 <몸값> 또한 붕괴된 건물 속 재난 스릴러적 전개를 보여준다. 드라마 <방법>이 극장판 <방법: 재차의>로 나왔듯 플랫폼 다변화를 꾀하는 일반적인 원소스 멀티유즈(OSMU)와는 또 다른 접근인데,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나.

= 넓게 보면 모든 작품이 김숭늉 작가의 <유쾌한 왕따>를 원작으로 파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게도 분명 새로운 접근이고, 현재는 각 작품을 열심히 구축 중이다. 하나의 지구에 포함된 여러 도시가 아니라 넓은 은하계를 각각의 행성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재난으로 황폐해진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미술, VFX 소스 등은 퀄리티를 갖추기까지 기본적으로 많은 시행착오와 물리적 비용을 소요하는데, 지금까지 여러 작품을 아울러 다루면서 이 방면에선 클라이맥스스튜디오가 가장 많은 노하우를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개별 작품들이 저마다 더 집중해야 할 부분에서 비용과 시간을 투여할 수 있는 장점이 생긴다. 콘텐츠가 많고 플랫폼이 다변화될수록 관객이 작품을 찾아보는 방식은 비선형적으로 바뀌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흥미를 유발하는 설정은 순환되도록 하되, 관람 순서나 세계관에 얽매이지 않고 개별 작품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져야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지켜낸 블랙코미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의 설명과 함께 아파트를 재건하는 몽타주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팝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짧은 몽타주로 편집되었지만 “장면을 리얼하기 만들기 위해 배우들은 연기 톤을 달리하고, 감독은 다채로운 연출적 시도를 더했으며, 주제적으로 은유도 풍부한 시퀀스”다. 변승민 대표는 “재난 스릴러의 숨통을 틔우는 방법이 반드시 관객을 파안대소하게 만드는 (대사 위주의) 코미디일 필요는 없다”는 과감한 시도를 높이 샀다. “배우와 스탭들이 낯설고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고민되었던 것도 사실인데 오히려 모두가 이 신의 뉘앙스를 정확히 이해하고 유쾌하게 해냈다.”

제작자가 꼽는 캐릭터별 한 장면

영탁(이병헌)

“N차 관람을 하는 관객들이라면 아파트 재건 몽타주 신 마지막 즈음에 이병헌 배우의 손하트에 주목해보시라. 영탁 혼자서만 (아주 작게 엄지척 한 모양새를 보여주며) 이상한 손하트를 한다. 엄태화 감독이 따로 디렉션을 준 것도 아닌데 이병헌 배우가 알아서 영탁이 가진 어떤 투박함, 혹은 어수룩함을 해석한 부분이다. 비슷한 예로 주민 회의 때 맨 뒷자리에서 귤 까먹는 모습도 작은 디테일이지만 캐릭터의 진폭을 확 넓히는 해석을 보여준다. 그가 얼마나 작품 전체를 관장하며 캐릭터를 날렵하게 조형하는 배우인지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민성(박서준)

민성이 명화를 구해낸 뒤 자신들을 쫓아오는 추격자를 문으로 막고 선 장면이 있다. 그때 문을 등지고서 명화를 향해 짓는 표정이 담긴 한컷에 놀랐다. 어떤 절박함. 그리그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업보를 맞이하는 것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읽을 수 있다. 박서준이란 배우가 트렌디한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매력 이상의 드라마틱한 깊이와 풍부한 표현력이 보인다.”

명화(박보영)

“비밀을 알게 된 명화가 아파트 주민들 너머로 영탁을 응시하는 한컷에서 여러 사람들의 실루엣 사이로 명화 얼굴에만 빛이 묻는다. 이전까지 배우 박보영에게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이미지 안쪽에 실제 배우 박보영은 중심이 단단하고 소신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는데 그런 기질이 명화라는 인물에 자연스럽게 투영된 것 같다. 관객에게는 신선한 모습일 수 있지만 배우 자신에겐 오히려 자연스러운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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