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오펜하이머라는 미지에서 놀런이 당도하려는 곳은 어디인가, <오펜하이머> 리뷰
2023-08-24
글 : 이우빈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인가. 이상한 질문이다. 제목부터 실존 인물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영화의 내용 역시 오펜하이머의 역사적 행적을 따른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를 온전한 전기영화라 부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이것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차근차근 짚어가다 보면 크리스토퍼 놀런이 왜 그리고 어떻게 <오펜하이머>를 만들었는지, 그 결론이 놀런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어림잡을 수 있다.

길가에 팬 물웅덩이에 빗물의 파장이 인다. 이 광경을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첫 장면이다. 관객은 오펜하이머가 어떠한 연유로 이토록 우수에 잠겨 있는지 파악할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이내 영화는 해당 장면과 영 무관해 보이는 시퀀스로 이동한다. 불꽃이 일렁이고 연소하는 일련의 폭발 과정인 듯한데, 아마 물웅덩이를 보고 있던 오펜하이머의 상상이 아닌가 싶다. 물과 불, 빗소리의 잔잔함과 폭렬의 굉음, 현실과 상상이란 대척의 요소들이 짝을 맞춰 단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혼재되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서술한 자막과 오프닝 타이틀을 거치면 오펜하이머가 좁은 방에 갇혀 심문받고 있는데 관객은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는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갱신을 위한 1954년의 비공개 청문회였으며, 종전 후 그가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아 조사받고 있음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와 동생 프랭크, 여러 친구와 친지가 공산당원이었으며 오펜하이머 역시 과거에 교수 노조 결성을 추진한 적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던 매카시즘의 시대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던 셈이다.

그가 일각의 공격을 받는 데 있어서 더 큰 이유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핵폭탄의 아버지’이자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 불렸던 그이지만, 종전 후에는 국제 핵무기 개발 및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미소 냉전 시기에 돌입하며 한창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던 때에 이런 의견을 내던 사람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십상이었다.

1954년 청문회 장면 이후, 화면은 금방 다시 흑백으로 전환되고, 미국의 거물 사업가이자 고위 공직자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1959년 시점의 공개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와 만났던 과거를 회상 중이다. 다만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 대한 맥락이 따로 제시되진 않는다. 이것이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발탁을 위해서 그에 대한 미국 과학자들의 신망을 증명하기 위한 자리였음은 관객이 이후에 이어질 장면들을 그러모아 직접 유추해야 한다.

이후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독일,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물리학 교수가 된 일화로 나아간다. 이어서 그에게 미 육군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가 찾아와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직을 제안한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수락하고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의 마음속 고향과도 같은 뉴멕시코의 황무지에 마을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이어간다. 그리고 결국 첫 번째 원폭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시키고,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등 20세기의 기라성 같은 과학계 위인들이 모습을 비춘다. 이러한 메인 플롯 중간중간에 수시로 1954년 비공개 청문회, 1959년의 스트로스 청문회 시점이 개입하며 이야기의 순서를 뒤섞는 것이 <오펜하이머>의 기본적 골자다.

전기영화로서의 불충분함

“제가 겪은 일들은 그 맥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1954년 비공개 청문회 자리에서 오펜하이머가 던진 말은 정확히 <오펜하이머>의 태도를 일축한다. 설명 없이 연달아 제시된 개별적 장면들은 그 맥락을 알 수 없는 터라 전체로는 잘 꿰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3시간의 러닝타임이 지났을지라도 여전히 미지인 상황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대사를 통해 “내 부모님도 자수성가했다”, “우리 동네에선 유대어를 안 썼다”, “네덜란드어를 한 학기 만에 배웠다”라는 신상 정보를 흘리듯 던지지만, 전술한 자기소개를 받쳐줄 전사는 곁들여지지 않는다. 또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연유에 대해서도 “맨해튼 프로젝트는 당신이 주도적으로 진행해야만 해!”라는 아내 키티의 조언만으로 인류의 존망을 책임지려 했다는 추측은 너무도 빈약해 보인다.

반면 영화의 원작이 된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오펜하이머의 아버지가 독일에서 건너와 의류업으로 성공했고, 이에 오펜하이머가 유대교 전통과 먼 에티컬 컬처 스쿨에 다녔다는 사실을 상세히 기술한다. 그리고 “나이 먹어서 보이는 그의 정치적 감성은 어릴 적 그가 받은 진보적 교육에서 비롯된다”라고 명백히 논하며 종전 후 그의 정치적 행보가 어떤 연유에서 시작했는지 알게끔 한다. 여기에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 유학 당시 네덜란드 여성과의 연애로 금방 언어에 통달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구체적 전사까지 더해져 약 1천 페이지의 전기를 완성한다. 이에 비해 영화 <오펜하이머>는 게을러 보이기까지 한다.

작품의 형식도 혼란스럽다. 아이맥스 스크린에선 2.20:1/1.43:1의 화면비가 수시로 교차하고, 컬러/흑백의 질감이 번갈아 난무하며, 숏/리버스숏의 더블 액션조차 대개 맞춰지지 않은 장면들이 최소한의 단위로 쪼개져 제공된다. 물론 이러한 서사 작법과 연출 경향이 크리스토퍼 놀런의 작품에서 낯선 사례는 아니다. 전작 <테넷>만 하더라도 인버전이니 시간 역행이니 하는 모든 상세 설정은 이미지로만 증명될 뿐 논리적 서사의 톱니바퀴에 일일이 짜맞춰지지 않았다. 이에 크리스토퍼 놀런은 <테넷>의 대사를 빌려 본인의 저의를 밝혔다. “이해하려 하지 마. 그냥 느껴.”

놀런이 당도하려는 곳

<테넷>의 대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펜하이머>가 실존 인물을 그린 방식은 놀런 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들어왔는지 살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이것은 놀런이 점차 ‘불확정’하고 ‘알 수 없는’ 소재, 이에 맞는 영화의 스타일을 택해왔다는 사실을 복기할 때 유의한 설명으로 변한다. 이를테면 초기작 <미행>과 <메멘토>에서 그의 쪼개진 플롯들은 원형의 서사 혹은 시점으로 귀결된다. <미행>은 약 20개의 플롯을 뒤섞어 제공한다. 그리고 연관 없어 보이던 플롯들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면서 극적 재미를 구가한다. <메멘토>에선 단기기억 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거꾸로 진행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서스펜스를 택했다.

<다크 나이트>에 와서 놀런은 달라졌다. 하비 덴트(투페이스)의 동전 게임이나 조커의 농담, 장난들은 정해진 결과가 없는 혼돈이었다. 그리고 당도한 곳은 예측하지 못할 꿈의 세계와 빙빙 도는 팽이의 변덕으로 점철됐던 <인셉션>이었다. 이후엔 대놓고 <인터스텔라>의 상대성이론과 <테넷>의 엔트로피를 극의 주요 주제로 삼으며 논리적으로 명백하게 밝힐 수 없는 소재를 택했다. 또 서사를 명쾌히 설명하는 플롯의 완결성이나 설명식의 대사가 줄고, 이미지를 통해서만 영화의 분위기와 소재의 기능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놀런은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차차 나아간 셈이다. 하나의 정답이 사라지던 그 경로의 끝에 양자물리학의 대가 오펜하이머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이러니한 필연처럼 느껴진다.

놀런의 영화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탐구 과정으로 뻗어가고 있다. <오펜하이머> 역시 이러한 태도를 일관하기 위한 연장선상이다. 비록 이것이 전기영화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놀런은 본인의 스타일을 번복 없이 고수하기 위해서 전기영화 속 실존 인물의 불확정성을 강조한다. 전술했듯 서사와 캐릭터의 맥락을 부분 소거하며 관객의 직관적이고 명쾌한 해석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오펜하이머>가 그리고자 하는 결론은 <인셉션>의 열린 결말과도 다르다. 외려 <오펜하이머>의 지향점엔 ‘없는 결말’이란 단어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오펜하이머의 진실을 우리의 눈에 그대로 보여준 다큐멘터리적 전기라면,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진실을 거울에 난반사해 불가해한 것으로 치환한 극적 반(反)전기다. 마치 너무나 밝아 그 빛에 눈돌려야 했던 작중 트리니티 실험의 원폭처럼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그 실체를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오펜하이머라는 미지

그러나 <오펜하이머>를 통해 오펜하이머란 인물을 아예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놀런은 더 크고 다양한 오펜하이머를 그리는 일에 성공한다. 오펜하이머는 아내 키티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건넨다. “이 유리잔, 술, 탁자 상판, 그리고 우리의 몸은 사실 거의 비어 있습니다. 물질 속의 원자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커서 꽉 찬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즉 인간의 몸이든 원자든, 혹은 우주든 간에 그것을 이루는 근간은 무수한 독립 개체들의 ‘연결’이다. 혹은 연결의 힘이다. 그러니 우주의 모든 별을 한 영화에 담을 순 없듯이 한 인간의 모든 성정과 속셈을 한 영화에 새겨넣을 순 없는 노릇이다.

대신 한 인간을 조망하는 영화적 최선은 전체의 상을 욱여넣는 것이 아닌 무수한 개별적 상들을 상상력으로 이어 붙이는 일일 테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플롯과 플롯, 숏과 숏 그리고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접합부를 제거하는 빠른 속도감의 편집, 다양한 형식미와 조합을 구가한다. 상상의 구성에 필요한 최대한의 경우의 수를 남기는 것이다. 더하여 두번의 청문회에서 많은 이들이 오펜하이머를 둘러싸고 법적 자료와 문건으로 왈가왈부하는 일 역시 오펜하이머란 인물을 여러 면으로 상상하기에 좋은 재료가 된다.

기실 오펜하이머는 죽음이란 닫힌 결말을 예정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실제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전기의 정의가 한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놀런이 통상의 전기영화를 거부하고자 한다는 전제를 다시금 증명한다. 즉 오펜하이머의 삶이 닫히는 기점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가 죽는 때는 보는 이들이 그의 일생 곳곳을 이어 붙이기를 멈추는 순간이다. 달리 말해 오펜하이머란 원자(들)의 분열과 융합을 멈추는 순간이다. 고로 크리스토퍼 놀런은 아주 텅 빈, 그래서 무엇보다도 커다랗고 견고한, 본인만의 전기영화를 성취했다. 작중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은 빛까지 삼키기에 우린 그것을 볼 수 없다.” 말하자면 J. 로버트 오펜하이머란 인물은 놀런이라는 거센 중력에 빠져 블랙홀 속의 미지가 되어버렸다. 그 심연의 어딘가에 오펜하이머가 살아 있다.

사진제공 유니버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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