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모른다는 주문을 외우며, ‘마스크걸’ 고현정
2023-08-29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영화 데뷔작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었듯, 첫 OTT 시리즈물 작업에 있어서도 고현정은 의외의 선택을 보여준다. <마스크걸>의 세 번째 김모미, 일명 모미C인 그는 폭주기관차 같은 작품의 종착지에 묘령의 얼굴로 유유히 서 있다. 한국 여자배우 중 여왕(<선덕여왕>)과 대통령(<대물>)을 모두 연기한 유일한 인물인 그에겐 “혼자 이끌고 가야 하는 역할도 있었다면, 좋은 배우들 사이의 일부로 놓여 즐겁게 촬영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들어 새롭고 반가웠던” 작품이 <마스크걸>이다.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에서 에르메스 백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순간마저 아이코닉해 충격을 준 이 배우는, “평소 자연스럽게 짓게 되는 표정과 근육을 최대한 쓰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스타성을 탈색시키면서 지금의 김모미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렇게 몸의 움직임까지 최소화해 만들어낸 고현정의 김모미는 무망한 삶에 간신히 적응한 비련의 여자이기보다 언젠가 다가올 다음 기회를 노리며 조용히 웅크린 맹수 같다. 힘을 툭 털어버렸지만 화면 속 그의 존재감은 여전한 박력을 품고 있다.

- 7회차 시리즈에 6회부터 등장하는 독특한 포지션으로 합류했다. 앞서 같은 인물을 이한별, 나나 배우가 차례로 연기한다. 이같은 배우의 쓰임과 형식이 낯설진 않았나.

= 다들 과감한 선택 아니냐고 물으시는데 내게는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일 뿐이다. 작품 전체를 보는 감독님의 눈을 믿으면서 항해사인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의심하지 않고 걸어가면 된다. 그러니 <마스크걸>을 보고 고현정이란 배우를 쓰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든 데려다가 쓰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웃음) 3인의 배우가 한 사람을 연기할 때의 캐릭터의 일관성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접근했다. 과거의 내가 꼭 현재의 내가 아니고, 지금의 우리가 어디까지나 과거로부터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 탄생한 존재라고 보긴 어렵다. 인생의 실제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지금의 모미였으면 했다. 항상 나 김모미는 단 5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고,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모른다…’ 그렇게 주문을 외우는 심정으로 현장을 돌아다녔다.

- 김모미C가 등장하는 순간 인물이 전보다 한결 초연해진 인상이 든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어떤 변화를 주고자 했나.

= 과거의 모미에겐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참담함들이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의 극복 방식으로 성형도 감행했는데, 내가 출연하는 구간 즈음에 이르면 그 모든 에너지가 다 식어버린 상태일 거라고 봤다. 살아서 돌아다니긴 하지만, 정말로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말하기는 힘든 그런 상태. 분장을 한번 해놓으면 일절 건드리지 않고 밥 먹고 쉴 때도 그냥 그렇게 살았다. 예전엔 “그런다고 뭐 감정이 더 잡혀?” 하는 부류였는데(웃음) 이번에는 그냥 그러고 싶더라.

- 등장 이후 꽤 시간이 흘러 첫 대사가 나온다. 딸의 행방을 알리는 경자(염혜란)의 편지를 받은 직후다. 꺼져 있던 한 사람의 불씨가 확 되살아나는 순간 아닐까.

= “나 여기서 나가야겠어.” <마스크걸>은 김모미의 많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모미는 과거에 여러 선택을 해왔는데 사실 잘 풀린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요 근래 이 말을 의심하고 있지만 어쨌든,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모미가 나가야겠다고 읊조리는 그 순간은 한동안 아무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으려던 인물이 다시 무언가를 선택하는 장면 같아서 좋아한다. 그동안 살기에만 급급했던 사람이 탈옥을 결심할 때는 처음으로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로서의 모미도 중요했지만, 인간으로서 한 사람이 이타적인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 <마스크걸>에서 고현정이 연기하는 모성이 신파적이지 않았던 이유도 될 수 있겠다 싶은 답변이다.

= 왜 모미를 내게 맡겼을까, 생각해봤다. 여러 이유 중에는 모녀간의 서사라는 점도 있지 않았을까. 감독님께 내 경험을 살짝 말씀드리기도 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도 물론 있었다. 김모미와 김경자는 참 다른 엄마다. 경자가 비록 삐뚤어지고 과격하더라도 자신의 모성에 자부심을 갖고 그걸 동기로 삼아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여자라면, 모미에게 모성은 쑥스럽고 민망한 감정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다. 스스로 그럴 염치가 없다는 마음도 있을 테고. 아무리 딸을 구하려 탈옥까지 한다지만 그걸 딸이 알 리는 없고, 이제 와 엄마의 권위로 딸을 좌지우지하거나 생색낼 처지도 못 된다. 그래서 아주 조용히 움직이는 느낌으로 있고 싶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미모 역의 신예서 배우를 볼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후반부에 동굴(젓갈 창고)에 들어가 모미가 처음 미모를 마주한다. 잠시 그 애를 쳐다보고는 그냥 곧장 손에 묶인 줄을 풀어주러 등 뒤로 간다. 그 장면을 그렇게 담담하게 찍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 뭉툭 자른 쇼트커트 스타일도 의외였다.

= 처음엔 머리가 굉장히 길었다. 감독님이 원해서 단발 정도까지 자른 뒤 카메라 테스트를 했는데 아무리 봐도 화면 속에 그냥 고현정이 있는 거다. 당시 쇼트커트를 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하룻밤 고민하고 그냥 가서 왕창 잘라버렸다. 기왕이면 누군가한테 억지로 잘림을 당한 것처럼, 뭉툭뭉툭 엉성하게. 그러고 나니 내 마음도 편해졌다.

- <마스크걸> 후반부에서 김모미가 보여준 무언가 비워낸 듯한 기운은 캐릭터 해석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고현정이 보여주는 진심이기도 한 셈이다.

= 하하, 감독님께 죄송하지만 아주 살짝 투영된 건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잘 쓰는 말투와 근육, 그런 것들이 다 김모미를 보여주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최대한 비우려 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나 자신이 들어갈 틈새가 생겨나기도 했다. 한동안 몸이 많이 아팠다가 건강해졌다. 오만함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아플 줄 몰랐다. 회복하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시쳇말로 ‘현타’가 왔다. 그동안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을 모르고 참 투정을 부렸구나, 싶어서. 한마디로 의심이 많았다. 겁이 나면 대신 화를 내버리는 성격이었는데, 몇년 새 정말 무섭고 힘든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일하고 연기하는 것에 깨끗한 감사함 같은 걸 느끼게 됐다. 지금은 그저 잘 쓰이고 싶다. 어릴 때부터 내가 평생 해온 일을 늦기 전에 더 제대로 잘해내고 싶다. 감독님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소리와 표정, 감정을 내어드리는 일에 몰두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 과거 <씨네21> 인터뷰에서 50대가 되면 조금 더 편안한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 생애 주기가 달라지면서 요즘 50대는 또 옛날 50대하고 다르다 하더라고. (웃음) 글쎄, 욕심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살면서 집중해야 할 것들을 좀더 추려내서 생각하게 된다. 여러 의욕이 줄어든 것 같은데 다행스러운 점은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다르다. 아직도 하고 싶은 걸 너무 못해봤다는 갈증이 더 크다.

- 이광국 감독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2017) 이후로 신작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영화쪽에서는 만족스러운 작품 제안이 없다고 느끼나.

= 영화가 정말로 안 들어온다. 복귀 후 <씨네21>과 함께 능동적으로 인터뷰 코너도 만들어보고 했던 것이 내게는 나름대로의 영화계를 향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저도 좀 끼워주세요!’ 하고. 노력은 했지만 작품으로는 잘 연결되지 않더라. 솔직히 말해도 될까, 지금 나는 작품에 목이 마르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배우로서의 엔진이 꺼지기 전에 최대치의 힘을 발휘해서 나 자신을 계속 시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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