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어파이어>(2023) 개봉을 앞두고 내한했다. <어파이어>는 ‘원소 3부작’ 혹은 ‘낭만주의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운디네>(2020)의 물을 불로 이어받았다. 불은 폭발음이나 불안함을 야기하는 헬기의 음향이었다가, 타오르는 하늘빛이었다가, 눈처럼 흩날리는 재가 되어 호흡기를 파고들더니 살갗마저 까맣게 태워버린다. 전에 없던 청춘 코미디의 톤으로 마음을 풀게 했던 이야기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Andata>와 함께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전조된다. 인터뷰 자리에서도 비극(?)은 예고 없이 닥쳤다. 통역을 사이에 둔 이해와 공감의 시차를 수줍고 호의적인 눈맞춤으로 메우며 이어졌던 인터뷰는 페촐트 감독의 허기와 휴식 요청으로 인해 타오르듯 마무리되었다. 끝내 하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 사이 남은 불씨를 어루만지다가, 시간이 충분하다는 착각이 만들어낸 우연의 샛길에 새삼 안도했다. 어쩌면 미완의 불완전함이 <어파이어>를 논하는 가장 적절한 요소일 수 있다고 감히 상상했다.
-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본 에리크 로메르 영화에서 받은 영감과 터키 화재 이후 고요한 숲에서 느낀 감정이 중요한 바탕이 된 것으로 안다. 생동과 죽음이라는 대조적인 에너지가 만나거나 경합한 과정이 궁금하다.
= 내가 코로나에 걸려 앓았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백신이 생길 거라는 전망조차 할 수 없을 때였다. 고열에 시달리던 내 침대 곁에는 집필 중이던 각본과 코로나 이전 프랑스 제작사가 선물로 준 에리크 로메르 DVD 전집이 있었다. 당시 나는 젊은이들이 도덕과 윤리를 잃어버린, 파시스트가 집권한 디스토피아 도시에 관해 쓰고 있었는데 팬데믹 시기 텅 빈 베를린 거리와 파괴된 일상, 그리고 터키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을 마주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의 삶을 찬미하고 싶었고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 흥미를 잃게끔 만들고 싶었다.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를 다시 보며 우리 삶이 정말 멋진 것이고 그 삶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 삶의 복합성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 작품을 구상할 때 구체적인 경험에 영향을 받는 편인가.
= 모든 영화에 나의 바이오그래피가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모든 각본에는 작가의 인생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어제 이창동 감독, 오정미 작가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는지에 관해 대화했다. 우리는 보통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하면서, 혹은 홀로 생각에 빠져 산책하면서, 서로의 말을 오해하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데에 공감했다. <피닉스>(2014)를 비롯해 여러 편의 각본을 공동집필한 하룬 파로키와도 산책 과정에서 느낀 감정과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만들곤 했다. 내 작품 중 <볼프스부르크>(2003)는 대부분 병원에서 진행되는 작품이다. 실제 딸이 아팠던 기억과 병원에 오래 머물면서 보았던 광경이 장면을 찍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 <볼프스부르크> 외에도 병원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 병원을 비롯해 고속도로, 호텔, 기차역, 해변 등이 흥미로운 장소인 이유는 다양한 계층이 섞이면서 무언가가 발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기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생성되었다. 내가 붉게 표시된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구석에는 빨간 원피스 차림에 다리에는 타투를 한 젊은 여성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의 빨간 원피스를 보면서 ‘왜 붉은옷을 입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느냐’는 한국에서 받았던 질문과 이창동 감독과의 대화에서 나눴던 ‘한국에서는 타투가 거의 금지돼 있다’는 말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 여성을 계속 쳐다봤나 보다. 어느 순간 그 여성과 옆에 있던 남자 친구까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실수했음을 직감했을 때 두 사람이 내게 오더니, ‘감독님을 알고 있다’면서 그 여성이 오늘 빨간 원피스를 입은 이유도 내 영화 <옐라>(2007)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신기하고 멋진 우연이었다. 영화는 크게 자동차의 영화와 지하철의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택시 드라이버>(1976)와 같은 자동차의 영화는 혼자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이때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침잠, 나쁜 판타지, 분노, 열정에 대한 것이다. 반면 지하철의 영화는 공동체의 이야기이며 사회의 이야기다. 아까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인터뷰로 읽는다면 연출한 상황이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다. 이 세계가 픽션을 찾는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기록하며
- 이번 작품을 통해 독일 버전의 여름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 미국과 프랑스에는 여름영화라는 하위 장르가 존재한다. 미국의 여름영화는 대부분 호러영화로 청소년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반면 프랑스영화에서 성장의 문턱은 고통을 동반한 놀이에 가깝다. 독일의 경우 여름영화가 하나의 장르로 존재하지 않는다. 청년의 영화라기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이야기이거나, 착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적응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내가 여름영화를 사랑하기에 무언가를 계획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이야기에 다다른 것 같다.
- 프란츠 로고브슈키처럼 마르고 직선형의 남성이 주인공이던 감독님의 세계에서 배우 토마스 슈베르트와 같은 둥글둥글한 이미지의 곡선형 배우가 등장한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가진 둥글지만은 않은 면모들이 외모와 충돌을 일으킨다고 할까. (웃음) 그래서 코미디 같으면서도 마냥 편히 웃을 수 없는 긴장을 일으킨다.
= 대조적이라 말했지만, 프란츠 로고브슈키와 토마스 슈베르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원래부터 배우는 아니었다. 이들의 장기는 배우 아카데미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프란츠는 과거 댄서이자 광대였다. 토마스 역시 광대와 같다. 두 사람은 관객에게 궁금증을 자아낸다. 극 중 레온은 절대 물에 뛰어들거나 상의를 탈의하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저 캐릭터가 숨어서 뭐 하는 거지’라고 의문을 계속 불러일으킨다.
- 레온은 무언가에 참여하는 사람이기보다는 한발 빼고 거리를 두며 지켜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지니면서도 사건에 포획된 전작의 인물들과 대조된다.
= 영화에서 거리감을 나타낼 때, 스스로 거리를 두기보다는 거리를 생성하는 사람을 그릴 수밖에 없다. 문학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믿지 않거나, 죽지 않거나, 이야기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 인물이 화자가 된다. 토마스 슈베르트는 1900년대 희극 속 캐릭터와 비슷하다. 문이나 창문 뒤, 그림자 속에 숨어 있거나 얇은 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거리를 두어야지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선과 관련해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일주일 전 파울라 베어가 독일에서 배우상(하넬로레 엘스너상)을 수상해 내가 축사를 쓴 적이 있다. 축사를 쓰면서 떠올랐던 생각은 <어파이어>에서 파울라가 남성 캐릭터의 시선을 가져간다는 점이다. 그녀는 지나쳐갈 뿐이지 남성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파울라가 자전거를 타고 사라질 때, 그는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남자에게 좌절을 안긴다. 남자는 보통 여자를 욕망하면 여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파울라 베어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 비밀스럽고 신비한 기운을 품은 존재를 연기했던 파울라 베어가 이번에는 일상에 가까운 연기와 이미지를 보여준다.
= 파울라는 자신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를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곧바로 흥미를 느꼈다. 현실적인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신발을 손으로 잡는 시늉을 하며) 무겁고 추한 신발을 신기거나 일부러 예쁘지 않은 자전거를 타도록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끔찍하고 무거운 신발을 신은 지 5초 만에 우아하게 걸었고 자전거가 예쁘지 않아도 그가 자전거 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파울라는 모든 것을 우아하게 소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캐릭터도 될 수 있다. 파울라는 아이스크림 판매원 연기를 위해 내 딸에게 특별 수업을 받기도 했다. 당시 딸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방학 기간에 일주일에 두번 시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했는데, 파울라가 일을 도우면서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제안해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일했다. 파울라는 아이스크림을 1인분씩 푸는 방법, 돈을 세거나 청소하는 방법, 무엇을 먹을지 한 시간씩 고민하는 아이들을 친절하게 돕는 모습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고 한다. 직접 가서 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절대 못 오게 했다. 촬영 당시 현장에는 따로 가림막을 치지 않아 사람들이 지나다녔는데, 실제 아이스크림을 판다고 생각해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웃음) 파울라는 실제라고 인식된 그 순간을 정말 즐거워했다.
- 오랜 시간을 공들인 것에 비해 막상 쓰인 장면이 많지 않은데.
= 오랜 시간 노동을 하더라도 영화에는 짧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오랜 시간 보여주면 관객들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불타는 멧돼지도 짧게 보여줘야 깊은 인상을 남기고, 관객이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계속할 수 있다. 파울라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할 뿐, 이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프란츠는 <운디네>의 한 장면을 소화하기 위해 3일 동안 용접을 배웠지만 실제 등장한 건 단 10초였다. 처음에는 이에 실망했지만 짧게 보여줘야 관객이 진짜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곧 이해했다.
- 인물들이 ‘일’이라는 단어를 자주 내뱉고, 다양한 직업이 언급된다. 인명구조원과 안전요원이라는 직업명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이나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폄훼되는 상황이 언급된다.
= 아는 사람이 없는 파티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할 때, 직업이 무엇인지부터 묻게 된다. 상대가 하는 일이 없다고 답하면 대화는 빨리 끝난다. 우리는 일을 통해 정체성이 생기는 사회에 산다. 한편으로는 끔찍하지만 만약 사회에 일이 없다면, 혹은 젊은이들이 실업자가 된다면, 나아가 실업자임에도 일하는 자의 정체성을 원한다면 사회는 충돌하게 된다.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하면 늘 누군가와 충돌하게 된다. 이 충돌이 나의 주제는 아닐지라도 내 모든 영화에 나타난다. <어파이어>에서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일을 강조하며 자신이 정체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기에 스스로 해체된다.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서도 일을 주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분노가 매우 큰 것 같다. 최근에 흥미롭게 본 영화들이 이같은 분노를 다룬 경우가 많았다.
시가 노래처럼 흐를 때
- 영화에서는 참혹함과 아름다움을 겹쳐놓고 있다.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데비트(에노 트렙스)의 시신이 폼페이 인간 화석에 비유될 때, 숲이 타들어가는 참혹한 광경이 붉은 하늘을 통해 비칠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죄의식을 불러온다.
= 그렇다. 우리는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반복해서 마주할 때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개입되어 있음을 잠시 잊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끔찍한 일이다. 다만 우리는 이미지를 경유해야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생각을 통해서만 잔혹함을 마음속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내레이션은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가 레온이 쓴 책을 읽는 장면으로 연결되며 비로소 목소리의 주인과 상황을 보여준다. 자기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대신, 누군가에 의해 읽히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작품은 <트랜짓>(2018)과 <어파이어>뿐이다. 과거에는 이런 보이스 오버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말로 들려주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보는 것과 설명하는 것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보이스 오버를 처음 사용했다. 화자는 이야기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있는 인물이다. <트랜짓>에서는 바 사장, <어파이어>에서는 출판사 편집자라는 포지션을 통해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느낌을 주면서,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에서 긴장감을 생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마티아스 브란트가 두 영화의 내레이터 역할을 맡았다.
=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촬영할 때 시간 순서대로 작업했는데 처음에는 젊은 배우들이 함께 살고 사랑하고 모욕하는 장면을 찍으며 즐거웠지만, 이후에는 어른이 나타나서 이야기를 통해 질서를 부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티아스 브란트가 이 역할을 한다는 것에 배우들이 굉장히 즐거워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좋은 악기이고 좋은 음악처럼 들린다.
- <운디네>에 이어 독일 낭만주의의 맥을 잇는 두 번째 작품이다. <운디네>에서 19세기 초의 설화가 영화 전반에 잠재되어 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아스라>가 식사 자리에서 직접 인용된다.
= <운디네>가 신화에 관한 영화였다면, <어파이어>는 노래에 대한 영화라는 점이 중요하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가장 유명한 책은 <노래의 책>이며, 하이네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의 시는 굉장히 자주 낭독되고 기억된다. 오늘날 앱에서 음악을 듣는 것처럼 과거에는 그의 시를 들었다. 프랑스와 미국처럼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상황을 이해하는 순간이 독일에는 없다. 적어도 나치가 시와 노래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후부터는 말이다. 영화 속 젊은 청년들이 먹고 마시며 아름다운 여름의 저녁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누군가에 의해 낭독된 그의 시가 노래처럼 들리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