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에는 반복되는 얼굴들이 있다. 페촐트 초기작부터 함께했던 니나 호스는 <피닉스>에 이르러 자신의 육체로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담아냈고, <트랜짓> 이후 페촐트의 영화는 파울라 베어와 프란츠 로고브슈키의 기묘하지만 단단한 인상에서 시작한다. 페촐트의 영화를 완성하고, 페촐트의 영화에 의해 인상적인 표상이 된 배우들을 정리해보았다.
니나 호스
TV영화 <나를 상기시키는 것> <볼프스부르크> <옐라> <열망> <바바라> <피닉스> 등 무려 여섯 작품에서 페촐트와 작업했다. 멜로드라마에서 역사드라마로, 필름누아르에서 스릴러로 페촐트의 영화가 확장되면서 니나 호스가 품은 정념 역시 장르와 시공간을 초월한다. 그리고 페촐트가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 독일의 역사가 마침내 <바바라>의 1980년대 동독과 <피닉스>의 나치 독일 수용소를 향했을 때, 니나 호스의 얼굴은 곧 냉전과 유대인 학살의 육체적 증언이자 시네마가 과거를 현실에 소환하는 매개가 된다.
진보 성향의 정치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고 특히 <피닉스>를 준비할 때 다큐멘터리 <쇼아>의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직접 공부해나갔다는 그는 배우의 역할이 실제 역사의식이나 윤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 예술가다. 그렇게 니나 호스는 거대한 역사와 개인의 트라우마 그리고 허구의 캐릭터를 관통하는 감정을 찾아나가며 페촐트 영화의 중요한 표상이 됐다.니나 호스의 활동 영역은 독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드라마 <홈랜드> 시리즈의 주요 출연진이자 최근에는 토드 필드의 <TAR 타르>에서 여성 지휘자 리디아(케이트 블란쳇)의 동반자이자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을 맡은 샤론을 연기했다. 영화는 대체로 리디아의 편집증과 추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샤론은 리디아의 권력 역학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지휘자보다도 여성에게 내어주지 않는 제1바이올린의 특수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피닉스> 이후 페촐트와의 인연은 잠시 멈춘 상태지만, 그가 페촐트의 멜로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우아한 결기는 언어와 국가를 넘어 유려하게 확장되고 있다.
파울라 베어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자신이 독일어 번역을 맡았던 프랑수아 오종의 <프란츠>에서 파울라 베어를 처음 발견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은 안나가 진실을 마주하며 경험하는 혼란을 섬세하게 연기했던 파울라 베어의 얼굴에서 페촐트는 그가 천착했던 유령의 이미지를 감지한다. <트랜짓>의 안나는 이미 죽은 남편과 그의 명의를 빌려 망명하려는 게오르그(프란츠 로고브슈키)의 존재를 자꾸 착각하고, 물의 정령을 모티브로 한 <운디네>에서 사랑이 품은 필연적 비극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운디네>에 이은 페촐트의 ‘원소 3부작’ 두 번째 작품 <어파이어>에서 파울라 베어는 별장 주변에 번지는 산불처럼 안전과 고립을 고집하는 상대에게 균열을 낸다. 보다 신화적인 존재를 연기한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현실에 발 디딘 인물을 연기했지만, 그는 페촐트 영화 특유의 무드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한 일상을 다채롭게 뽐낸다.
파울라 베어가 분한 역할들은 일견 이성과의 멜로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품은 다층적인 은유는 가장 원형에 가까운 우화나 고전을 현대에 이식하는 신묘함을 갖고 있다. 스스로 롤모델로 꼽기도 했던 니나 호스와 이미지가 닮았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니나 호스를 잇는 페촐트 감독의 다음 뮤즈가 되어 <트랜짓> 이후 모든 영화에 출연했다는 식의 편견은 95년생 신예 배우 파울라 베어가 가진 가능성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이다. 투명한 얼굴로 순수와 매혹을 오가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파울라 베어가 본능적으로 타고난 순도 높은 감정이 독일 아트하우스 영화를 넘어 뻗어나갈 미개척 영역을 즐겁게 상상하게 된다.
프란츠 로고브슈키
제2차 세계대전, <트랜짓>의 게오르그는 나치의 독일을 벗어나 멕시코로 망명하려고 한다. 그가 선택한 곳은 상대적으로 나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지만 언제 그들에게 점령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한 프랑스의 마르세유. 죽은 작가의 여권을 이용해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던 게오르그는 작가의 아내 안나가 등장하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 전쟁과 학살의 불안을 실체적 이미지로 구현한 프란츠 로고브슈키는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운디네 신화로 재해석한 <운디네>에서는 외부의 불확실성이자 그럼에도 신화를 깨고 믿고 싶은 열렬한 대상이 된다.
프란츠 로고브슈키가 시네필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계기는 독일 독립영화의 신성 야코프 라스와의 작업(<러브 스테이크> <빅토리아> <타이거 걸>)과 미하엘 하네케의 <해피엔드>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골칫덩어리 아들로 분한 커리어였다. 원테이크로 촬영한 <빅토리아>에서 보여준 집중력과 유머 그리고 유연함은 페촐트에게도 가닿았다. 흥미로운 것은, 프란츠 로고브슈키가 처음 영화 일을 할 때 맡은 건 안무였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현대무용을 했던 이력을 살려 다양한 무용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신체를 알고 의식하기보다는 순간적인 직관이 연기에선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일찌감치 얻은 영민한 배우다. 신체 컨트롤에 능하다는 장점은 물론 <인 디 아일>에서 보여준 자연스러운 프랑스어 능력까지 갖춰 미래가 더 밝은 그의 차기작은 데이비드 미쇼 감독의 <위자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