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1970년대의 오마주이자 2023년 영화인을 향한 응원가, ‘거미집’ 김지운 감독
2023-09-28
글 : 송경원
사진 : 오계옥

- 이번 <거미집>에 대한 언론 반응을 살펴보았는지.

대체로 재밌다는 평이라 다행이다. 세세하게 살펴보니 “나는 재미있었는데 일반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는 평이 다수였다. 생각해보면 <조용한 가족> 때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웃음의 재료를 사방팔방 뿌려놨는데 그 방식이 생소해서 어떻게 조합될지 낯설다고 해야 할까. 이게 지금 웃어도 되는 건가, 지금 무서워야 하는 건가 헷갈리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무장해제가 되는 순간이 온다. <조용한 가족> 때는 송강호 배우의 “저 학생 아닌데요?”라는 대사가 그랬던 것 같다. <거미집>은 한명의 감독이 마음속 불씨를 꺼내고 활활 태워 모든 걸 전소시키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언젠가 어떤 수업에서 연출의 과정을 점화, 착화, 발화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는 그 마음가짐을 충실히 구현했다.

점화 - 얼어붙은 시대와 멈출 수 없는 열정

- <거미집>에서 웃음의 발화점은 어디인가.

여기서부터 터지겠구나 생각한 곳은 여러 지점이었는데 시사 후 반응을 보니 미도(전여빈)와 유림(정수정)이 세트 뒤 통로에서 한판 붙을 때를 말하는 분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인물관계나 상황이 쌓이고 공감이 되면서 웃음이 터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절한 타이밍이다. 솔직히 나는 김열, 아니 송강호가 깨어나는 거의 첫 장면부터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도 감독 김열처럼 영화 촬영을 마치고 악몽을 자주 꾼다. 현장의 답답했던 상황이 꿈속에서 무한 반복되기도 하고 “아, 이거 찍었어야 하는데 안 찍었네!” 하면서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웃음) 개봉 때가 되면 특히 심해진다. 개봉날인데 극장에 셔터가 안 열려 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다 꿈이라는 걸 깨닫고 안심한 적도 있다. 그렇게 불면과 불안의 밤을 오가다 보니 꿈에서 깨어나는 김열이 눈을 뜨는 첫 장면부터 이미 밀착되어 터졌다. 나는 그 절박함과 불안함을 잘 아니까.

- 칸영화제 버전에서 편집을 추가로 꽤 했다고 들었다.

많진 않고 흐름을 좀 다듬었다. 칸 버전보다 좀더 흐름에 박차를 가하고 빠르게 가야겠다 싶어 사무실에서 전체회의를 하는 장면을 걷어냈다. 감독으로서 늘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공간집착형 스타일이라는 거다. 정신을 차려 보면 공간 구석구석을 다 쓰려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냐 공간의 예술이냐는 평행선을 달리는 문제지만 내가 공간에 애정을 쏟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다보면 종종 전체적인 흐름이 느려질 때가 있다. 처음 <거미집> 대본 리딩을 할 때부터 배우들에게 말했던 건 이 영화가 음악처럼 흘러가면 좋겠다는 거였다. 대사를 주고받는 리듬이 한곡의 음악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우선순위는 리듬감이었고 스스로 특정 공간에 매료될 때 내가 세운 대명제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

- 말한 대로 소동극처럼 우당탕탕 흘러갈 것 같은 컨셉의 영화지만 사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분리되어 있다. 전반부가 감독 김열의 불안과 고뇌에 집중하며 내레이션을 자주 사용하는 반면 후반부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같은 영화처럼 촬영이라는 상황에 정신없이 휩쓸려간다.

전반부가 불안 속에서도 열망을 숨기지 못하는 김열 감독의 시점이라면 후반부는 확신을 얻은 감독이 모든 걸 불사르는 전개다. 그리고 불은 혼자 붙지 않는다. <거미집>의 장르를 구태여 설명하자면 앙상블 코미디다. 촬영장 곳곳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세트가 바뀌지만 큰 틀에선 신성필림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인물마다, 장면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 종종 다른 속도로 전개되지만 전체 흐름하에서 어느 한 장면에 치우치지 않고 나름 잘 배분했다고 생각한다.

- 1970년 영화 촬영 현장을 무대로 삼았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신성필림 사람들이 다 벌벌 떠는 문화공보부 국장의 존재로 상징되는 이른바 검열의 시대인데.

당시의 엄혹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시절에 존재했던 영화적 활기를 되새겨보고 싶었다. 70년대를 고른 건 내가 그 시절 문화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70년대 대중문화 속에서 자랐다. 태어나서 가요, 영화 등을 처음 접했던 게 70년대다. 초등학생 무렵 영화를 자주 봤는데 아버지가 영화 포스터를 담벼락에 붙이는 걸 허락해주고 초대권을 받으면 그걸로 온갖 영화를 봤었다. 예전 MBC 다큐멘터리 중에 미국 할리우드영화와 팝송을 총망라해서 소개한 <멋지고 힘나는 70년대>라는 다큐멘터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내게 70년대는 그런 콘텐츠의 파노라마, 그리고 돌아가고픈 노스탤지어로 기억된다.

- 동시에 엄청난 검열과 금지의 시대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맞다. 그 간극이 이 영화를 찍게 된 계기다. 70년대는 유신정권의 시대였고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한 암흑기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를 되돌아보면서 두 시절 사이 기시감을 느낀다. 60년대는 한해 20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고 1인당 영화관람 편수도 높았던 한국영화 르네상스였다. 그러다가 70년대의 겨울이 왔다. 감독이 된 지 햇수로 25년째인데 단편 혹은 광고라도 아무것도 찍지 않았던 해는 없다. 팬데믹 이후 1년간 모든 작업이 중지되면서 혼자 과거를 되돌아볼 시간을 강제로 가지게 됐다. 그 기나긴 겨울밤이 <거미집>의 바탕이 됐다. 팬데믹이 지나도 봄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절을 어떻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 영화감독 김지운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을 건네고 싶었다. 지지 마. 한번 더 힘내봐.

- 어떤 면에서는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한 부분이 있다.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감독이라거나. (웃음)

아니 내가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데, 전체 흐름을 위해 시범을 보여준 정도지. (웃음) 자전적이라면 사연이라기보다는 창작의 고통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을 이어가는 정도일 거다. 현장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70년대를 향한 오마주인 동시에 2020년대 영화 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을 향한 응원가다. 어떤 감정들을 직접 대사로 표현하기도 하고 에둘러 상황에 투영하기도 했다.

- 김열은 왜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그 장면을 다시 찍어야 했던 걸까.

김열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어쩌다 괜찮은 데뷔작을 찍은 감독의 자기 증명일 거다. 이것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것 같다는 게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전하고 싶은 만큼 절박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느냐는 거다. 소설가가 단어 하나에 며칠을 고뇌하는 것처럼, 대중은 이해하지 못해도 평론가에게 꼭 필요한 분석의 미세한 지점이 있는 것처럼, 감독에게는 이 장면이 아니면 안된다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수십번을 다시 찍고 오랜 불면의 밤을 보내는 거다. 정말 잔인한 건 그렇게 꼭 필요했던 장면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턴 이 장면이 맞나? 진짜인가? 하는 믿음의 시험이 시작된다. 창작은 그렇게 끊임없이 어떤 욕망에 몸을 불태우는 일이다. 그렇게 얼어붙은 시대에 여전히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는 영화인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 웃어넘기고 힘내자고, 괜찮다고, 잘했다고,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다. 아무도 두드려주지 않아서 일단 내 등부터 셀프로 두드리고. (웃음)

착화 - 감독 김지운의 송강호 사용법

- 고뇌, 괴로움 같은 의미를 말했지만 영화는 전반적으로 귀엽다. 국밥집에서 김열 감독은 영화인들의 비판에 의기소침해 있다가 현장에서 누가 조금만 칭찬해줘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뻐한다. 그 솔직하고 가벼운 모습에 홀려 끝까지 쫓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감독은 제일 높은 자리에서 현장을 바라본다. 지위가 높다는 게 아니라 현장을 조망하는 조감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 부담감에 자연히 몸이 굳거나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그런 욕망을 아이처럼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호세(오정세)가 유림을 챙기며 너무 가혹하다고 투덜거릴 때 김열이 “이게 나만 좋자고 이런 거야?”라고 하는데, 툭 하고 던져서 웃기게 하지만 실은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고백인 거다. 예전 <달콤한 인생> 촬영 때 이병헌 배우가 땅에 묻혔다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물을 막 뿌려야 하는 상황에서 다들 배우가 너무 힘들어하니 조심조심 뿌리는 거다. 내가 과감하게 막 정면에 물을 뿌렸더니 나중에 이병헌 배우가 정색하며 왜 이러시냐고 한 적이 있다. 너무 이해가 갔지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만 좋자고 이래?” (웃음)

- 허술하고 귀여운 매력의 상당 부분이 김열 감독으로 변신한 배우 송강호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는 김지운 감독이 바라보는 송강호는 언제나 인간적인 허술함과 웃음으로 표현된다.

송강호 하면 생각하는 건 생활형 연기, 자연스러움 같은 거다. 동시에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 정서를 장악하는 힘을 갖췄다. 쥐락펴락 호흡 조절이 자유자재다. 그 서늘한 연기의 바탕에는 결국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들의 송강호 사용법에 대해서 누가 써놓은 짤을 본 적이 있다. 봉준호는 송강호를 지질하게 그리고, 박찬욱은 송강호를 멋지고 근사하게 그리고 싶어 하고, 김지운은 자기가 웃으려고 송강호를 찍는다고. (웃음) 어떤 면에서는 일리 있는 분석이다. 사실 송강호 배우에게 특정 연기를 주문한 적이 거의 없다. 전체적인 상황과 뉘앙스 정도만 공유하고 본인의 해석으로 연기한다. 그때 카메라 앞에서 송강호가 펼치는 템포와 타이밍은 거의 동물적이다. 나는 그 상황의 첫 번째 관객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다.

- 그러고 보면 감독님은 송강호 배우를 찍을 때 클로즈업보다는 롱숏을 즐겨 찍는 것 같다. 전체적인 몸의 실루엣을 오래 담고 싶어 한달까. 이번에도 문공부 부장을 피해 세트 뒤편으로 전력 질주하는 김열의 모습이 맛깔나는 웃음을 자아낸다.

웃음만큼 섬세한 뉘앙스가 필요한 것도 없다. 정확한 타이밍에 웃으라고 요구하는 게 일반적인 코미디의 방식이라면 나는 그게 살짝 비틀려 있는 타이밍을 좋아한다. 웃긴 장면에서 조금 어긋나 있거나 살짝 떨어져 있는 박자가 주는, 한 박자 뒤늦게 찾아오는 메아리 같은 웃음이랄까. 그런 호흡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게 송강호다. 감독으로서 내가 할 일은 자연스럽게 그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적절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거다. 여기서 무대는 단지 공간이 아니라 한 타이밍 길게 찍는 호흡,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거다. 여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목적과 필요, 딱 보여주고 싶은 대상에서 살짝 초점이 벗어나 있는 순간. 때로 진실은 거기에 담기는 거 같다. 비단 송강호 배우뿐만이 아니다. 이번 영화에선 모든 배우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호흡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말했던 ‘여기 지금 무언가 일어난’ 순간들이라고 할까. 그래서 영화 현장을 무대로 택했다. 대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찍는 과정으로서의 영화.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을 누락된 순간들을 함께 보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끊어지지 않는 플랑 세캉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 김열 감독이 신상호 감독(정우성)의 환영을 보는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의 톤이 바뀐다. 달리 표현하면 그 장면이 김열의 내면에 집중하던 전반부의 실질적인 하이라이트다.

이틀만 더 찍으면 걸작이 된다는 김열의 말은 사실 공허하다. 아무 근거도 없고, 들이미는 시나리오는 더 황당하다. 심지어 자기도 확신이 없다. 그래서 백 회장(장영남)이 들이닥쳐 촬영이 중지됐을 때 김열도 주저앉아버린다. 김열에겐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겐 확실한 절박함이 있다. 이대로 삼류 감독이 될 순 없다는 절박함. 그 감정이 <거미집>의 출발이었고 모든 감독들의 안타까운 욕망일 것이다. 거기서 제일 희망적인 말을 건네고 싶었다. ”자신을 믿어.” 어쩌면 유일한 답이기도 하다. 많은 조언과 도움이 있지만 결국 현장에서 결정, 판단, 책임까지 오로지 감독의 몫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를 찾아 헤매는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 다만 이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라기보다는 끊임없는 불안을 전제로 한 자기 확인에 가깝다.

- 감독님이 지새운 무수한 불안의 밤은 조금 밝아졌나.

지금도 불안하다. (웃음)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엄청 예민한 상태였다. 예민함을 즐겼다고 해야 할까. 날이 바짝 선 몰입의 감각이 만족스러워 스스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은 편안해졌다.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물론 숱한 시행착오의 결과인데, 실패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하나 있다. 어차피 감독의 일이라는 게 선택의 연속이라면 설사 틀리더라도 멋지고 근사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 신상호 감독은 “꺼내서 다 태워버려”라는 말과 함께 불에 타 사라진다. 그때 정우성 배우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시키지 않았다. 알아서 했다. (웃음)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됐다. 신상호 감독 역을 정우성 배우에게 부탁한 건 근사하기 때문이다. 60, 70년대 영화인들은 하나같이 멋쟁이들이다. 근사한 게 좋다. 극 중 신상호 감독은 문자 그대로 다 태워버리고 사라진 분이니까 그 환희의 음악을 따라가다 보니 내면의 음악이 삐져나온 거 아닐까. 웃기고 슬프고 애처롭고 숭고한 황홀경의 순간이다. 어떤 면에서는 정우성 배우가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준 건데, 나는 이 영화를 음악처럼 전달하고 싶었다. 내면에 숨겨진 욕망, 각자의 리듬이 충돌하고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앙상블 말이다. 즉흥적이지만 조화로운 재즈의 잼(Jam)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지막 플랑 세캉스 장면에 재즈 음악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다.

발화 - 오인된 것이 우리를 불태울 때까지

- 김열은 집에 불이 붙는 장면을 플랑 세캉스로 찍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장면이 흑백영화 ‘거미집’에 꼭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김열 감독의 ‘거미집’은 클로즈업과 역동적인 앵글, 컷의 연결이 중요한 영화인데 말이다.

‘김열은 왜 플랑 세캉스를 고집하는가.’ <거미집>에선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열의 ‘거미집’에 플랑 세캉스는 필수가 아니다. 김열은 걸작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배우나 제작자가 플랑 세캉스가 뭔데, 라고 되물을 정도로 이건 익숙한 연출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 있어 보이는, 예술적인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는 게 김열의 강박이다. 그 욕망의 1차원적인 집착이 플랑 세캉스로 표출된다. 하지만 김지운의 <거미집>에서는 플랑 세캉스 장면이 꼭 필요했다. 말했다시피 내가 찍고 싶었던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대상이 아니라 여백이었다. 카메라 뒤편의 공기와 분위기, 동선의 연결과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 플랑 세캉스의 연결은 그런 바깥의 에너지와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이다. 물론 김열의 집착은 오인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열의 욕망은 진짜다. 오인된 행위를 통해 거꾸로 김열의 욕망과 절박함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 나도 오인한 게 하나 있다. 이만희 감독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낸 만큼 김지운 감독님이 언젠가 한국영화의 과거를 찍는다면 그 대상은 이만희 감독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었다.

그 시절의 모든 감독들을 애정하고 존경한다. 그중 이만희 감독은 다양한 장르를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내 관심사와 일치하는, 나와 비슷한 유형의 연출자라고 감히 생각해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스릴러 <마의 계단>(1964)을 연출한 분이 <쇠사슬을 끊어라>(1971) 같은 만주 웨스턴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떤 의미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이미 그분을 향한 헌사를 마친 셈이다. 의식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장르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빼어난 미장센뿐 아니라 어떤 영화, 어떤 장면에서도 품격이 있다.

- 공간과 미장센은 감독님 영화에서도 핵심이다. 언제나 화면을 아름답고 예쁘게 찍는다.

공간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다. 마음에 드는 장소라면 구석구석 담아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그래서인지 평론가들에게 자주 듣는 칭찬이 미장센 부분인데, 어떨 땐 그 표현이 전혀 칭찬처럼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다. 미장센은 단지 장면을 예쁘게 찍었다, 스타일과 표현이 도드라진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되어야 한다. 미장센에서 미술적인 요소는 일부에 불과하다. 진정 중요한 건 장면의 필요다. 이 순간에 왜 저런 표현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예전에 이명세 감독님이 장면이 안 풀릴 때 자문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마틴 스코세이지가 찍었다면 어떻게 할까. 구로사와 아키라라면? 누구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이 있다. 하지만 그건 답습이 아니다. 그 질문이 계속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결국 마주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내면의 불꽃. 김열이 마주했던 것도 그런 불씨다.

- 흑백영화 ‘거미집’에서 민자(임수정)와 유림이 다투는 2층 공간이 무척 근사하다.

거미들의 집이니까 거미 눈알처럼 작은 원형의 거울을 빽빽하게 배치했다. 욕망을 드러내는 공간인 만큼 그로테스크한 배치와 녹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색감을 배치했다. 어차피 흑백인데 왜 원색을 썼냐고 한다면 공간성이란 그런 애착과 디테일, 태도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는데, 주인공의 치마 속 원단을 최고급으로 해달라는 요청에 보이지 않는 걸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배우가 최고를 입고 연기해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진짜는 그렇게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엔딩 장면에서 김열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시사회장 관객 모두가 박수와 칭찬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밝은 기색이 없다.

그것도 일종의 여백이다. 각자 다른 걸 발견했으면 좋겠다. 다만 내 의도는 두 가지 정도 있었는데, 하나는 주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거였다. 아까 말했듯이 이만하면 잘 만들었다, 고생했다, 괜찮다는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또 하나는 내가 김열의 입장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였는데, 나는 일종의 주마등을 볼 거 같다. 스크린에 상영되는 화면, 그러니까 결과물이 아니라 이걸 찍기까지의 과정과 지나온 시간, 쏟아냈던 감정들을 마주하는 거다. 카메라 뒤에 존재했던 시간들이라고 해도 좋겠다. <거미집>은 큰 틀에서는 그 뒤편의 경험들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던 영화다. 모든 걸 다 태운 뒤에 남는 하얀 재와 같은 시간을 마주할 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너를 믿어, 무엇이든 해봐라. 요즘 말로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나?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함께하셨으면 좋겠다. 물론 재미있게. 재미와 의미는 언제나 한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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