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은 단어마다 자기만의 시선을 담으며 <이적의 단어들>을 썼다. 1995년 패닉 1집 《Panic》으로 데뷔한 이래 <달팽이> <거위의 꿈> <다행이다> <빨래>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 작곡, 가창하며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자리한 뮤지션 이적이 생애 첫 산문집을 발간했다. <이적의 단어들>은 단어에 관한 101가지 소고가 들어 있다. 그간 대중과 음악으로 소통해온 작가답게 이적은 책을 기획할 당시부터 지난 3년간 개인 SNS에 원고의 일부를 조금씩 공개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시간, 고스톱, 층간소음, 멀티태스킹…. 이적은 그만이 가진 필치로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들에 새로운 빛을 틔운다. 에세이 작가로 데뷔한 이적을 만나 그가 끈질기게 붙들어두는 단어에 관해 물었다.
- <이적의 단어들>은 인스타그램, X(구 트위터) 등에 올린 단어에 관한 단상을 엮은 책입니다. 10여년 전에도 공식 홈페이지에 연재하던 글을 묶어 <지문사냥꾼>이라는 몽상집을 내셨죠.
= 정확히 말하면 그때 글들은 제 홈페이지에 적힌 메일 주소 ‘적메일’에 구독 신청을 하면 제가 글을 메일링해주는 시스템이었어요. 그래서 홈페이지엔 글이 남아 있지 않죠. 그걸 한 출판사에서 보고 책을 내고 싶다 하셨던 거고요.
- 그때나 지금이나 플랫폼에 걸맞은 글쓰기를 고민하셨을 듯합니다. 책으로 나오기 전엔 데스크톱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어야 하니까요.
= 이전에도 산문집을 출간하자는 제의가 종종 있었어요. 저는 FM라디오도 오래 진행했고, 제 이야기는 TV방송에서도 많이 하니까 구미가 당기지 않았죠. 그런데 이번 책을 출판한 김영사의 편집주간이 단어에 관한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주셨어요. 백지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보다 명확한 동기가 있는 글쓰기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컨셉을 잡은 후 글을 쓰는데 글이 길어지니 또 흥미가 떨어졌어요. 제가 긴 글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요. 압축적인 글을 고민하다 인스타그램이 떠올랐죠. 인스타그램은 기본적으로 정방형의 사진에 최적화된 SNS잖아요. 그 프레임 안에 텍스트가 들어가면 자연스레 글이 일정 분량을 안 넘길 것 같았어요. 플랫폼이 가져다주는 제약이 쾌감을 줘요. 이번 책에 오래전 트위터에 썼던 짧은 픽션들도 넣었는데, 트위터가 처음 나왔을 때도 140자의 한계 안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게 재밌었죠. 노래 가사도 그렇거든요. 저는 늘 멜로디를 먼저 쓰고 가사를 후에 쓰는데, 음의 개수와 흐름이 이미 나온 상황이면 언어가 붙을 때 한계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읊조리는 벌스(Verse)에 과한 감정을 담은 가사를 넣는 것도 안되고, 고음이 터지는 하이라이트에 관조적이고 냉소적인 가사를 넣을 수도 없어요. 이전에 적메일을 쓸 때가 생각나네요. 제가 적을 ‘Juck’으로 표기하거든요. C를 N으로만 바꾸면 정크(Junk) 메일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보내는 메일이 정크 메일이야, 원하는 사람만 읽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죠. 구독자 입장에선 제 글을 받아보면 ‘이거 실화냐?’ 했을 테고요. 그것도 이메일이라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요.
동글동글하게 글쓰기
- SNS에 걸맞은 문체가 있던가요?
= 책이면 날을 세워 써도 되는 글이 있어요. 하지만 SNS에 먼저 업로드하려면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기 때문에 더 동글동글하게,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글을 써야 해요. 책에 산에서 이어폰 없이 크게 라디오를 켜고 등산하는 분들에 관한 <이어폰>이라는 글이 있어요. 전 그런 분들 정말 싫거든요. 그런데 제 속엣것을 그대로 쓰면 상처입는 분들도 생길 거예요. 분명 댓글에 “우리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등산하시는데요, 우리 아버지 그렇게까지 쓰레기 아닙니다” 같은 반응이 달릴 거고요.
- 독자를 상정한 글쓰기를 지속한 셈입니다.
=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고 크게 두어번 기사화된 적 있어요. 그중 하나가 <지폐>였어요. 그 글은 농담에서 출발했어요. 3만원권을 만들자며 이 연사 힘차게 외친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게 2만원 3만원은 용돈으로 주기 뭣한 한국인의 호기를 건드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 국회의원이 갑자기 이 글을 토대로 3만원권 발행 촉구 국회 결의안을 추진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사회·정치면에 제 이름이 나기 시작했어요. 기존 팔로워들이야 이 글이 유머에 기반한 내용임을 알지만, 뉴스를 보고 처음 오신 분들은 “일개 가수가 뭘 안다고 그러냐. 3만원권을 만들면 전국 ATM을 바꿔야 하고 사회·경제적 비용 지출이 상당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죠. 오슨 웰스가 1930년대에 연출한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한 거냐며 간밤에 소동이 났다는 일화가 생각났어요.
- 단어 하나에 떠오르는 영감을 기록하는 습관도 갖고 계실 것 같아요.
= 누가 재밌는 이야길 건네거나 아이들과 지내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기면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요. 제가 요새 자주 하고 다니는 말이 있어요. “잘 잊는 건 문제가 아닌데 스스로 잘 안 잊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 문제다”라는 말이에요. 좋은 아이디어라도 메모를 안 해두면 다음날 그때의 강렬함만 남고 알맹이는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잖아요. 물론 술자리에서 듣고 좋은 이야기라며 메모해두었다 다음날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후자가 낫죠.
- 책엔 다양한 장르의 글이 등장합니다. 어떤 단어를 염두에 둔 후 하위 장르를 설정하셨나요, 아니면 단어가 떠오르면 동시에 장르를 결정하셨나요.
= 글도 음악성이 필요해요. <숲> 같은 글은 음절의 꼴을 고려한 글이고요, <잠> 같은 글은 텍스트만 봐도 아이유의 노래 같은 느낌이 들었으면 했어요. 음악 없이 글만 읽어도 리듬감이 느껴져야 해요. 책을 낼 때 편집자가 너무 긴 문장은 명료하게 바꿨으면 좋겠다는 응당 필요한 피드백을 주셨는데, 그중 20%만 수용했어요. 만약 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이라면 그렇게 고쳤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 책 속 글들은 장단(長短)이 가장 중요했어요. ‘덩기덕쿵덕’에서 ‘기덕’을 다 빼고 ‘덩’만 연속하는 글이 되는 순간 재미없어요.
- 대개 이런 책들은 단어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재정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만의 사전을 새로 편찬한달까요. 반면 <이적의 단어들>은 그런 방식의 서술이 아니었어요. 재정의가 아닌 재제시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 그건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만약 그렇게 책을 썼다면 단어를 선정할 때부터 앞이 캄캄했을 거예요. 장르도 섞고, 제 노래에 관한 글도 섞은 이유도 계속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어린 시절 <악마의 바이블>이란 책을 재밌게 읽었어요. 그 책의 내용은 모든 걸 냉소적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를테면 우정이란 단어를 ‘서로의 이익을 숨기는 행위’와 같은 식으로요. 그것도 몇 페이지 읽으니 뒤로 갈수록 어떻게 쓸지 빤하더라고요.
- 포스팅마다 댓글도 읽어보았나요.
= 네. 거의 다 읽어봤어요.
- 혹시 필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맥락을 담은 댓글도 있었나요.
= <성공>이란 글이 예상과 다르게 풀렸어요. “성공이란 동업하기 싫은 사람과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상태”라고 말한 글이죠. 그 글을 올릴 때 걱정했거든요. 아무래도 제 SNS 팔로워는 학생보다 직장인, 자영업자가 많잖아요? 그분들이 보기엔 제가 성공을 논하는 게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어요. 그런데 글을 포스팅하자마자 ‘좋아요’가 2만5천개가 넘게 붙고 댓글에 “퇴사 후 우울했는데 당신의 글을 읽으니 저도 성공한 사람인 걸 알게 됐어요”와 같은 공감의 물결이 일었어요. 사실 올릴 때만 해도 욕먹을 각오하고 올렸는데. (웃음)
죽음은 늘 우리 옆자리에
- 책의 이야기 중 노래로 발전시켜보고픈 글도 있나요.
= 아직까지 그런 마음이 드는 글은 없어요. <커피>의 경우 카페인에 취약한 제 상태에서 출발한 글이에요. 커피를 마시면 두근두근한 게 커피 때문인지 내 앞의 당신 때문인지 모른다는 글을 읽고 많은 분들이 이 글을 노래로 써달라고 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쓴 글이긴 하지만 제 이미지와 너무 상극이잖아요. 남에게 줄 수는 있겠죠. (즉석에서 멜로디를 지어 부르며) “커피 때문에 두근대는 이 마음~” 폴킴이 부르면 모를까!
- 책 속 픽션들의 주제를 요약하면 위기,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죽음은 이적의 창작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직전에 발표한 그림책 <어느 날,>도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UFO> 같은 노래도 “왜 모두 죽고 나면 사라지는 걸까”로 시작하죠.
= 어릴 적부터 애독하던 책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에요. 그 책을 읽을 무렵부터 죽음 뒤의 이야기를 고민했어요. 그 고민이 노래도 되고 동화도 됐을 거예요. 올해 49살이 되니 죽음이 더이상 멀리 있지 않아요. 조사가 들려올 때 부모상이 아닌 본인상인 경우도 늘고요. 죽음은 늘 우리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 어떤 단어를 보면 그 뜻을 해부하는 과정을 즐기실 듯한데요.
= 네 맞아요. 어원에 관한 책도 많이 읽고요. 감귤(柑橘)처럼 한자어라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단어가 있으면 다시 역으로 단어의 탄생 과정을 추적해보기도 해요. 한자가 분명 외국어였을 텐데 우리말로 정착한 과정을 탐구하는 것도 재밌어요. ‘너를 위(爲)해’, ‘계곡을 향(向)해’ 같은 말 보세요. 어쩌면 한때 ‘보그체’라며 조롱됐던 언어 습관이 이미 조선시대부터 만연했던 거예요. 그렇게 말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지금 우리의 문장에 영어식 발상이나 번역체가 들어온 역사도 생각해보고요. 제가 사회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저널리즘적인 글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언어에 관한 책도 못지않게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 한때 어휘량이 늘려면 사회학을 공부하거나 교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두 분야에서 통용되는 조어 방식을 생각하면 모두 자신만의 번역 체계로 그 세계에서 통하는 단어를 만들잖아요. 이를테면 긍휼, 인애 같은 단어들이요.
= 처음 성경을 번역할 때 말투가 있어서 그렇지 않았을까요.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로 글을 시작해야 고결해 보일 땐 그것이 동시대(contemporary)성을 지닌 한국어였을 거예요. 저는 무교지만, 그 말을 또 지금 식으로 바꾸면 덜 신성해 보일 것 같네요. 루터가 16세기에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반발이 정말 심했대요. 그렇게 되면 시정(市井)의 말과 신의 언어가 다를 게 무어냐면서요.
- 인터뷰를 준비하며 지금껏 SNS 등에 쓰신 글을 읽다 놀랐어요. 작문 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를 하나도 안 하시던데요? 그중 이중 피동과 과도한 사동을 안 쓰는 점이 가장 놀라웠어요. ‘부딪다’와 ‘부딪히다’를 구분하고, ‘잊혀지다’ 아닌 ‘잊히다’를 쓰는 가수라니! “시키거나 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정의 발로인가?” 하는 과한 해석도 해봤습니다.
= 남들이 제게 무언가를 시키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제 아이들한테도 주의하는 부분이고요. 어릴 때부터 거부했어요. 제 노래 <왼손잡이>도 그런 거부 정신의 일환이죠. 간결하고 정확한 글쓰기를 지향하다 보니 사동이나 피동을 잘 안 쓰는 것 같네요. 퇴고할 때 단어의 배치를 많이 생각하거든요. 퇴고 시 부사어도 웬만하면 다 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부사어가 말의 리듬을 살리는 경우라면 또 갈등해요.
“이적은 통역가야”
- <하늘을 달리다>의 가사에 말의 리듬이 잘 살아 있어요. 후렴부 “마른 하늘을 달려” 같은 가사는 노래하기 편한 저모음 /ㅏ/의 배열이기도 하지만 또 철저히 지킨 모음조화가 생성해낸 율격이기도 하죠.
= 가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1절과 2절에 유사한 음소를 배치해두고 혼자 놀라곤 해요. <하늘을 달리다>도 ‘내 몸’과 ‘내 맘’을 번갈아 사용하는데 그렇게 썼다는 걸 나중에 발견하죠.
- 이적씨만의 말버릇도 있나요.
= 장기하 같은 친구들이 제 성대모사를 할 때 꼭 따라하는 습관이 있어요. 제가 무슨 말을 쭉 하다 꼭 ‘요는’ 이라며 정리한대요. 아이들이 가끔 “아빠 말투가 나한테 들어왔어~” 할 때도 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때 일, 이, 삼 이런 식으로 넘버링을 한대요. 어느 날 큰딸이 제 앞에서 “아빠 그게 아니지. 일!” 하는 순간 당황했어요.
- 무언가를 종합하고 정리하는 버릇이 있으시네요.
= 제가 말 정리는 기가 막히게 잘하죠. 예전에 김영하 작가가 제게 “이적은 통역가야”라고 말해준 적이 있어요. 가끔 저희 둘에 정재승 물리학자랑 뮤지션 정재형씨까지 모여 놀아요. 재형이 형이 초감성적인 언어로 말하고 재승 교수님이 완전 이공계의 언어로만 말을 하면 둘이 전혀 다른 이야길 하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그럼 제가 “교수님, 재형이 형의 말은 이런 내용입니다”, “형, 교수님은 이런 뜻으로 말하신 거야”라고 정리해주죠.
- 글이나 가사를 쓸 때도 자주 쓰는 단어가 있으신가요.
= 일상에서 안 쓰는 말을 꼭 무리해서라도 쓰고 싶을 땐 있어요. <하늘을 달리다>도 ‘설혹’을 꼭 넣고 싶었고, <거위의 꿈>도 ‘남루’를 꼭 넣고 싶었어요. 최근 <철옹성>이란 노래를 썼어요. 그러다 같이 작업하는 동생에게 “너 철옹성이란 단어 아니?”라고 물었는데 처음 들어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곡은 바로 버렸어요. 나보다 10살 어린 친구도 모르면 보편성이 있겠나 싶어서요.
-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커리어 초창기에 내놓은 가수들이 흔히 직면하는 비판 혹은 오해가 당신의 언어에선 예전의 날카로움이 사라졌다는 평이에요.
= 요즘엔 그런 질문을 덜 받긴 해요. 왜냐하면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언어는 이제 대중문화에서 프로파간다로 여기니까요. 지금은 수많은 채널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수 있잖아요. 90년대에 한정된 플랫폼에서 직설적이고 분명한 노래를 부를 때의 영향력과 다르죠. 막상 제가 이제 와 문제와 의문을 제기하는 노래를 내놓아도 큰 호응은 없고요. 저 같아도 뉴진스 노래 듣고 싶거든요. (웃음) 기성세대가 아닐 때에야 “어른들 책임져라”와 같은 가사를 쓸 수 있었지만 지금 그런 가사를 쓰면 내가 어린 척하는 것밖에 안돼요. 그래서 가사의 양상이 점점 바뀌어요. 지금 제가 쓴 가사는 우리 세대가 자행한 일에 관한 통렬한 반성, 그리고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이 주를 이뤄요. 인간은 원래 이 정도밖에 안되고, 예전의 실수를 여전히 반복한다는 걸 깨우친 것 같기도 하고요.
공통질문
1. 글이 안 써질 때 나를 책상 앞에 앉게 만드는 힘없어요. 10년 전 <씨네21>에 ‘이적표현물’을 연재할 땐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글들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썼거든요. 이번 책을 쓰겠다고 비싼 돈 주고 홈쇼핑에서 랩톱도 샀는데, 거의 열지 않았어요.
2. 언젠가 내 글을 낭독해주길 바라는 목소리나와 전혀 딴판인 분이 읽는다면 재밌을 것 같아요. 특정하긴 어렵지만 20대 여성의 목소리라면 새롭게 들릴 것 같아요.
3. 내 인생의 책지금 다시 꺼내보진 않는데, <카프카 단편집>이요.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제 가사의 발상 방식에 영향을 줬어요. <달팽이> 같은 곡이 특히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