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타인과의 여정을 고민하며,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감독
2023-11-14
글 : 조현나

<수성못>을 본 관객이라면 차기작으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내놓은 유지영 감독의 행보가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온전히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유지영 감독은 일과 임신, 출산에 대한 고민을 재이(한해인)과 건우(이한주)에게 솔직하게 투영했다. 두 사람은 가족을 이루기로 어렵게 합의했으나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품으려 할수록 더 많은 것이 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이토록 불안정한 두 연인의 관계가 각자의 성장으로 이어지게끔 유지영 감독은 섬세한 연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 오랜만의 장편 연출작이다.

= 항상 힘든 시기를 지날 때 이 시간을 글로 쓰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과 두려움이 해결됐거나 혹은 이것을 글로 풀어내 정리하고 싶을 때 말이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됐나.

임신과 같은 사건은 전부 픽션이다. 아주 오래 만난 연인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낀 적이 있다. 이대로 관계를 이어간다면 삶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수순으로 흘러가는 건지,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영화를 완성할 때까지 그 시간을 기다려주고 본의 아니게 희생해야 하는 부분이 생긴다. 과연 그게 옳은 일인가 싶은 생각까지 복합적으로 든 시기였다. 그래서 한 커플에게 예기치 못한 아이가 찾아오는 사건을 설정하고,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결말을 정하지 않은 채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 고 정미경 작가의 소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 본래 처음 정한 제목은 <Birth>였다. 정미경 작가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재밌게 읽었는데, 작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 김병종 화백이 신문사에 추모글을 기고했는데 마침 그 글의 제목도 소설에서 따온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었다. 글을 읽으니 작가가 예술가이자 엄마, 아내로서 얼마나 충실한 시간을 살아냈는지 알겠더라. 삶을 대하는 강인한 태도와 글에 대한 몰입력을 보면서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유가족의 허락을 받고 제목을 사용했다.

- 임신부와 워킹맘의 사연을 많이 수집했을 것 같다.

= 임신 경험이 없어 주변의 사례를 듣고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같은 관련 서적도 찾아봤다. 때마침 가까운 지인이 임신해서 만삭 때까지 주기적으로 만났다. 곁에서 보니 미디어에서 묘사한 임신과 출산이 전부가 아니었다. 입덧이 심해 말라가는 임신부도 있고, 영화에 인용했듯이 임신부를 위한 약은 전무하다시피 한 게 현실이었다. 소설을 쓰는 재이를 위해 작가들의 루틴도 찾아봤는데,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글에 대한 진심만 강조하고 과장된 표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재이가 글을 쓰기 전 촛불을 켜는 건 내가 항상 하는 습관이다.

- 재이와 건우가 다투는 장면을 눈여겨봤다. 두 사람이 가장 크게 충돌하는 순간인데 이들 사이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마스터숏으로 촬영했다.

= 원래 마스터숏을 잘 안 찍는다. 그 장면도 먼저 화면을 크게 잡은 뒤 컷을 분할해 들어가려 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두 배우의 에너지가 어마어마했다. 나만이 아니라 스탭들이 전부 느꼈다. 촬영분 그대로 써도 되겠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연출부에서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며 콘티대로 한번 더 찍자고 제의했다. 한번 더 찍는 대신 배우들에게 마음대로 해보라고 했는데, 기존 시나리오에서 한 단계 확장된 연기를 보여줬다. 그렇게 찍은 두 번째 컷을 영화에 썼다.

- 그만큼 배우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장면이 많다. 한해인 배우는 내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너의 극장에서>의 다른 에피소드에서부터 눈여겨봤다. 독특한 목소리에 연기도 섬세하고 그만큼 존재감이 강한 배우다. 이번 영화의 캐스팅을 고민할 때 재이 역으로 한해인 배우가 떠올랐다. 만나보니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이미 재이 같았다. 불안해 보이면서도 속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이한주 배우는 단편 <파테르>를 보고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대구단편영화제 기간에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건우랑 비슷한 면이 있더라. 그때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꼭 보내겠다고 했고 그렇게 출연이 성사됐다.

- 결말을 정하지 않은 채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상 여러 외적 요소로 인해 재이와 건우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적다. 오히려 이들의 향방에 대한 연출자의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 극의 분위기를 증폭하기 위해 넣은 영화적 장치들이 있기는 하다. 어느 순간부터 틀어진 인물들을 묘사하고 싶었다. 그 인물들이 연이은 사건으로 눌러온 욕망을 서서히 드러냈으면 했다. 다만 한 사람은 에너지를 폭발시키는데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침잠한다. 이런 상반된 반응은 처음부터 설계해둔 흐름이었다. 이 영화는 건우가 불 꺼진 가로등을 마주하면서 시작하고, 재이가 걸어갈 때 가로등이 다시 켜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건우가 재이를 위해 가로등을 고쳐달라고 재차 민원을 넣었다는 사실을 재이는 평생 모른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이가 생긴 뒤 재이와 건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지만 그만큼 본인이 원하는 바를 알게 된다. 그런 깨달음만 있다면 타인과 함께하는 여정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파도에 휩쓸리다 결국 그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서퍼처럼 캐릭터들이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 고 정미경 작가가 15년간 쓰던 노트북이 고장 나 그간 쓴 글이 전부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얼마 전 내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8년 정도 함께한 노트북이 폭발한 것이다.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올해로 40대에 접어든 만큼 글도 새롭게 시작하라는 계시 말이다. 글 쓰는 것도 좋지만 타인의 시나리오를 연출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시나리오를 해석하고 현장에서 배우나 스탭과 소통하며 촬영하는 과정이 훨씬 재밌어서다. 좋은 각본과 인연이 닿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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