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없다면 어땠을까. 임신과 관련해서는 여성 캐릭터의 발언에 주목하기 마련이지만 워낙 변화가 극적인 탓에 건우의 행방 또한 주시하게 된다. 영어 강사인 건우는 언성 한번 높인 적 없을 듯한 온순한 얼굴로 성실히 아이들을 가르친다. 학원 분점을 운영해보지 않겠냐는 원장의 제의를 받아들인 건 순전히 재이(한해인)와 아이를 지키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영화 <흐르다> <여섯 개의 밤> 등에서 차분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배우 이한주는 “1부터 10까지의 감정을 넘나드는” 건우 역으로 배우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입증했다.
- 유지영 감독과 대구단편영화제에서 만난 인연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고 들었다.
= 그렇다. 그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작품을 같이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로부터 1년 정도 뒤에 정말로 시나리오를 보내주셨다. 읽어보니 건우는 감정의 진폭이 점점 커지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감정도 강렬해서 표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캐릭터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중요하게 보고, 그 지점에 흥미를 느낀다. 건우 역할에 도전하면 배우로서 스펙트럼도 넓힐 수 있을 것 같았고 은연중에 내가 잘해낼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 건우가 워낙 담담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그런지 재이보다 건우의 변화가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서 그렇다. 그런 건우의 부침이 얼굴에도 드러났으면 했다. 대부분 대구에서 촬영했는데, 숙소 근처 헬스장에 등록해 운동도 하고 식단도 조절하면서 체중 관리를 했다. 후반부에는 살짝 수염도 기르고, 고립되어가는 인물이라 스탭들과도 되도록 어울리지 않으려 했다. 그런 시도가 연기할 때 도움이 많이 됐다.
- “건우는 땅이고 재이는 그 위의 나무 같은데, 이한주 배우에게서 그런 건우의 면모가 보였다”고 유지영 감독이 밝힌 바 있다. 이 말에 동의하나.
= 비슷한 부분이 있다. 안정을 추구하고 속상한 점이 있어도 잘 말하지 않는 점이 그렇다. 건우라는 인물의 목표는 딱 하나다. 행복하게 지내는 것. 그래서 재이와의 관계에도 나름 적극적인데 생각만큼 잘 풀리진 않는다. 그래도 노력했기에 나름대로 성장이 있었다고 본다.
- 아이를 두고 상이하게 갈리는 두 사람의 의견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 내가 건우를 연기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건우에게 더 몰입하고 그가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재이가 건우와 충분히 상의하지 않은 채 혼자서 아이를 지우기로 결정한 뒤 병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지 않나.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이 지점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아이를 갖지 말자고 사전에 합의하긴 했어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건우와 좀더 대화를 나눴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건 재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재이니까 건우로서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재이가 예민하고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라 건우는 되도록 재이와 부딪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최대한 맞춰주려고 했다. 건우는 집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의도한 대로 따라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재이랑 건우는 워낙 다른 사람이다. 사랑하기에 버텼지만, 너무 달랐다.
- 뮤지컬로 데뷔했는데 어떤 계기로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됐나.
= 어릴 때부터 춤추고 노래 부르길 좋아했다. 그러다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연극영화과였지만 연기에 크게 뜻을 두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친구들과 연극도 무대에 올리고 연출도 하기 시작한 건 고3 무렵부터다. 이후 대학에서 뮤지컬을 전공하고 <맨 오브 라만차>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운 좋게 대극장 뮤지컬에 계속 출연했는데, 무대 뒤편의 앙상블로만 서너 작품을 하다 보니 연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영화로 눈을 돌렸다. 서른살이 되기 전에 영화 한편은 꼭 찍어보고 싶었는데 관련 필모그래피가 없다 보니 오디션을 봐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이 연출한 단편영화 <오두막>과 <파테르>에 출연했는데 다행히 성과가 있었고, 장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됐다. 한때는 아주 잘생기고 대단한 사람들만 배우를 할 수 있다고 여겨서 배우라는 직업 자체에 거리를 뒀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영화를 할 땐 모니터링을 하기도 부끄러웠는데 영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무대와 달리 내가 연기한 부분이 영상 기록으로 남고, 그걸 확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내게 소중했던 것 같다.
- <최악의 악>으로 처음 드라마에 도전했다.
= 초반에는 긴장을 많이 했는데 극의 호흡이 긴 만큼 스며들 시간이 충분해서 금방 익숙해졌다. 운 좋게 비슷한 연령대의 배우들이 많아서 더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일부 상업영화나 드라마는 독립영화에 비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가 많은데 그런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야 해서 아직 배울 게 많다.
- 얼마 전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소감을 이야기해준다면.
= 연출에 뜻을 둔 지는 오래됐다. 대학 때도 ‘영필름’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 영화를 찍었을 정도니까. (웃음) 그동안은 배우로서 활동할 일이 많아서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할 시간이 잘 주어지지 않았었다. 배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직업이지 않나. 선택받기 위해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피곤하게 느껴지고 지쳐갈 무렵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찾아보게 됐다. 그래서 예전에 써둔 글을 보면서 연출을 시작했다. 예전에 연기 학원에서 3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 겪은 사건을 반영했다. 당시 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배우로 출연해 내겐 의미 깊은 작업이다. 주변에 얼른 보여주고 싶어서 편집도 벌써 마쳤다. 내년에 영화제에 출품도 해보려고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