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진심이 발휘될 때, ‘나의 피투성이 연인’ 한해인
2023-11-14
글 : 이자연

시종일관 상대방의 의중을 살피는 표정, 메마른 목소리, 다소 불안한 눈빛. 소설가로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재이(한해인)는 타고난 섬세함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나날은 괴롭지만 안정적이고 불안하지만 평화롭다. 임신 사실을 알기 전까진 그랬다. 뜻밖의 임신 소식은 재이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낯설고 불편한 신체 변화부터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말투까지, 인간 재이는 흐릿해진 채 세상은 엄마 재이만 남겨두려 한다. <생각의 여름>(2020), <아워 미드나잇>(2020), <달이 지는 밤>(2020) 등에서 인물의 말투와 표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배우 한해인은 재이의 갈등 또한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작품과 관객의 거리를 좁힌다. 재이는 어떤 동시대성을 띠는가. 그가 상징하는 여성의 불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한해인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재이는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지만 아득한 미래에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재이를 어떻게 바라보았나.

=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내러티브의 에너지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뭐랄까. 꼭 꺼내져야만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시나리오를 고를 때 신중한 편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재이란 인물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나 또한 기질적으로 예민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재이를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재이는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곧바로 흡수해버리는 사람이다. 그게 얼마나 버겁고 고통스러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일부러 낮고 굵직한 목소리보다 가녀린 목소리를 활용했다. 그의 떨림과 예민함, 섬세함이 잘 드러나길 바랐다.

- 재이는 임신을 원치 않았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인해 자기 의지와 다른 선택을 한다. 재이가 어떤 동시대성을 띠고 있다고 보나.

= 현실에서 재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들이 많다. 이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이나 이미 지나온 사람들이 충분히 재이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자기 사정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들도 영화를 통해 본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결혼과 임신, 출산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안고 있기 때문에 재이가 이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잘 대변해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더더욱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 모든 상황에 따르는 재이의 반응을 진솔하고 투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기술적으로 요령을 부리기보다 진심일 때 발휘되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한창 촬영 중일 때에는 스스로 질문을 많이 건넸다. “지금 진심으로 하고 있니?”

- 주변인들의 무심한 말은 재이를 서운하고 억울하게 만든다. “아이 먹인다고 생각”하라는 시어머니부터 호르몬 변화에 고통스러워 약을 처방해 달라고 말하자 “따로 약은 없어요. 그래도 아이는 건강하잖아요”라고 답하는 산부인과 의사까지. 이런 말들이 재이 안에 차곡차곡 쌓여왔다. 개인적으로 가장 울컥한 대사가 있다면.

= 돌이켜보니 무심하게 느껴질 만한 대사들이 정말 많다. 등단한 후배를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들었던 말이 가장 울컥했다. “언니, 글만 쓸 수 있게 오빠가 서포트해주니까 애도 낳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솔직히 적어도 고마워는 해야지. 형부가 희생하는 거잖아”라는 후배의 말. 그 희생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다가왔다. 재이가 어떤 마음으로 출산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억누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재이는 표면적으로 보면 집에서 일하고 당장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주부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강하다. 자아실현을 하고 오랫동안 바라온 꿈을 이루는 게 재이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기에 후배의 날카로운 말을 듣는 순간 진짜 서글퍼졌다.

- 재이는 똑 부러지고 결단력이 강한데 이상하리만치 임신에 관해서만큼은 결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이미 아이가 자라고 있는 상황에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 모습도 그의 흔들림을 보여준다. 선택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어쩌다 놓친 듯한 느낌이 강하다.

= 정말 재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까. 병원에서 수술 이후의 부작용을 들이밀면서 경고를 주지 않나. 임신도, 임신 이후의 모든 결정들도 재이가 내린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떠밀려간 부분이 크다. 방황하는 동안 어느새 몇 개월이 훌쩍 흘러가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이가 선택한 것들은 그가 진짜 원한 것은 아니었고, 또 두려움을 기반한 결과에 가깝다. 무엇보다 재이는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는 인물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했던 만큼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 여성의 신체 자기 결정권에 관해 활발하게 이야기되는 만큼 다양한 갑론을박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건넬 수 있을까.

= 이 영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게 중요하다. 영화가 왜 불편한지, 정확히 어떤 점이 불편한지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여성들의 생각을 솔직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것만으로 무척 가치 있는 작품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 곳곳에 발화가 많이 되어야 할 주제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대중적 이해도가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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