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 게 2019년이니 계산하면 얼추 들어맞는다. 2008년 <아이언맨>에서 시작해 11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한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슈퍼만 강조하며 정작 히어로는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내놓으며 연명해왔고, 그 대가는 3년이 지나 비어버린 곳간에서 쥐어짜낸 <더 마블스>를 통해 톡톡히 치르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필자는 관련 업계 종사자로서 누구보다도 슈퍼히어로 장르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국공신 두명을 날리는, 마블 스튜디오를 제외하고 세상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과감한 결정과 함께 거창하게 포문을 열었던 페이즈4와 5는 역시 거창하게 출범한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방영하는 시리즈를 꼬박꼬박 챙겨보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든 대사와 캐릭터라는 벽을 스스로 쌓아올림으로써 신규 관객 유입의 기회를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블이 왜 그랬을까? 언뜻 납득할 수 없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어벤져스: 엔드게임> 개봉 다음해인 2020년, 마블은 IP 확장을 목표로 에이도스 몬트리얼 제작, 스퀘어 에닉스 유통으로 <마블 어벤져스>라는 AAA급 게임을 발매했다. 인섬니악의 <스파이더 맨> 게임 시리즈가 거둔 대성공을 보고 고무되어 기획했음이 분명한 이 게임은 안타깝게도 처참하게 실패했다. 라이브서비스를 핑계로 터무니없이 빈약한 게임을 내놓고는 6만4800원 풀프라이스 가격표를 붙여둔 것이다. 게다가 어디서 배워온 건지 영웅들의 코스튬 언락을 위한 현질 요구에, 알맹이 없는 8만6600원짜리 딜럭스 에디션은 귀엽기까지 했다. 필자는 이것이 이후 마블이 팬을 대하는 오만한 태도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마블이 소프트 리부트를 고려 중이라는 루머가 얼마 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코믹스 <시크릿 워즈>를 기반으로 리부트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건 지난 8월이며, 10월에는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 대표의 입을 빌려 이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기사도 공개됐다. 며칠 전에는 배우 크리스 에반스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속편 출연에 합의했다는 루머까지 올라오며 여러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루머가 루머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지금 같아선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성이 없어 차라리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퇴장시킬 때부터 큰 그림을 그려둔 것이라고, ‘마블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고 믿고 싶을 정도다.
MCU 리부트가 가능할까? 쉽게 답할 순 없지만, 이미 검증된 코믹스 원작을 기반으로 신중히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분명 아니다. 멀티버스의 충돌 및 평행 세계 영웅들의 갈등과 협력을 그린 <시크릿 워즈>는 현재 중구난방으로 펼쳐져 있는 MCU 멀티버스 사가를 마무리하고 새출발하기에 적절한 스토리인 동시에 인피니티 사가 못지않은 무게감을 선사할 수 있는 원작이다. 다만 코믹스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리부트한다고 해서 영화 리부트를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위험하다. 수십년에 걸친 역사를 지닌 코믹스는 10년, 20년 단위로 달라지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포화 상태의 캐릭터와 복잡하게 얽힌 여러 설정을 정리하기 위한 리부트가 필수에 가깝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연속성을 포기하고 한편의 독립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매체인데, 현재 MCU가 딱히 스토리가 꼬였다거나 캐릭터가 많다거나 해서 지금과 같은 문제를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리한 리부트는 거부감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MCU가 페이즈4 이후 고전하는 이유는 첫째, 서두에 언급했듯이 지금의 마블 영화에는 영웅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실 생각보다 답이 간단하다. 영웅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힘을 쓰며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다. 스티브 로저스는 누구보다 빈약한 육체를 지닌 채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상대도 되지 않는, 타노스라는 극강의 존재에게 난타당하면서도 기어코 다시 일어나 부서진 방패를 고쳐 쥘 수 있는 것은 그가 영웅이기 때문이 다. 가망 없는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함께 주먹을 쥔 채 응원하게 되고,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어벤져스, 어셈블”이 흘러나올 때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이기적 인간이었던 토니 스타크 역시 <어벤져스>에서 잠깐이나마 미래를 본 후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결국 “나는 아이언맨이다”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를 희생해 우주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영웅으로서의 삶을 끝낸다. 도중에 있었던 잠깐의 갈등과 부침(<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은 그의 인간적인 면을 더욱더 부각하는 장치가 되어준다. 영웅은 인간적인 흠이 있을 때 더 영웅적이지 않은가.
만일 마블이 그저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리부트를 생각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MCU의 문제는 영웅이 없다는 점이며, 이는 리셋 버튼을 누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재미가 없다’는 문제 역시 각본과 연출로 보완해야지 리부트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MCU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공감하기 힘든 템포의 PC 달리기를 리부트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는 극장을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장애물이다. 감히 예상컨대 마블은 리부트 후에도 마블의 하락세를 불러온 여러 요인을 버리지 못하며 오만함을 고집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만 봐도 미래는 밝지 않은데, 심지어 문제의 진짜 핵심인 디즈니는 아직 언급도 하지 않았다. 디즈니가 건재한데 리부트가 MCU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리부트 루머 중 하나인 크리스 에반스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복귀 소식은 참혹하기까지 한데, 최고의 엔딩을 선사하면서까지 퇴출시켰던 영웅을 되살리는 최악의 선택은 제발 피했으면 하며 혹여 등장시키더라도 중요한 순간 전환점이 되는 역할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본다. “여러분이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그립다고 하여 되살려드렸습니다”가 되어선 곤란하다. 코믹스에서는 캐릭터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이 그야말로 병가지상사이지만 이는 100년 가까운 코믹스 역사 동안 수천, 수만편의 작품이 나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MCU의 역사는 이제 15년밖에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슈퍼히어로 장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지금, 리부트는 그 피로감을 배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면 애초에 MCU로 인한 피로도 자체가 만만치 않으므로 똑똑한 리부트는 적절한 처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부트를 하게 된다면 마블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등 MCU에서도 좋은 평을 받는 작품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되짚어보았으면 한다. 또한 많은 작품들이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도 보석처럼 빛났던 작품이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였다는 사실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부디 함정에 빠져 옴짝달싹 못한다고 해서 자충수는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함정을 던진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마블 본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과연 마블이 ‘망한 부자’에서 ‘재기에 성공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기엔 그동안 마블에 쌓인 애정이 너무나도 크다. 제작진만 뿌듯해하며 만족하는 결과물이 아닌 관객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작품, MCU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