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삶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연인’ 황진영 작가
2023-12-14
글 : 이자연
사진 : 최성열

양천, 인옥, 영랑, 덕출, 들분, 항이, 인옥, 한석, 동찬, 넙석, 짱이, 병희, 넛남, 정인…. <연인>에 등장한 포로들 이름을 자연스레 나열하는 황진영 작가의 모습은 <연인>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이 아닌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이들을 오랫동안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채(안은진)와 이장현(남궁민)이 피워낸 전란 속의 사랑은 로맨스 이상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 타인의 안전을 기도하는 마음, 상처를 지닌 이들을 끌어안는 포용력. 황진영 작가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대 속에서 움튼 소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중하게 그러모았다.

- <연인>은 병자호란 발발 이후의 이야기를 담는다. 많은 전쟁 중에 병자호란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병자호란은 오랑캐라 얕보던 청나라 황제에게 임금이 고개를 숙인, 조선사회에 파문을 던진 전쟁이다. 그럼에도 드라마나 영화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패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간 콘텐츠로 채택된 것은 주로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비극이나 소용 조씨 강빈이 얽힌 궁중 암투가 대부분이었다. 조금 이상했다.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 실상은 더 참혹했다. 수만여명의 포로가 맨발로 끌려갔고 도망치다 잡히면 뒤꿈치가 잘리거나 귀가 뚫렸다.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면서 이 이야기를 꼭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향 여성에 대한 기록, 도망친 포로에 대한 기록, 포로들에 대한 조선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입장 등 자료를 찾아가면서 조금씩 자신감도 찾았다. 하지만 제작 단계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큰 제작비를 들여 슬픈 역사를 재현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고, 주변으로부터 병자호란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부모 자식, 포로들간의 연대, 목숨을 걸고 돌아온 포로들의 맹렬한 생의 의지 등을 생각하며 이 이야기를 반드시 세상에 내놓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조정에서 이혼시켜야 한다 논의했다는 사실은 몹시 흥미롭게 느껴졌다. 시대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구슬펐다. 비극의 역사를 통과하는 위대한 사랑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꼭 구현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여기까지 왔다.

- <연인>은 현대적 관점을 반영한 두 주인공의 면모가 눈에 띈다. 장현은 비혼을 고수하고, 길채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하지 않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간다. 특히 자원이 고갈됐을 때 길채가 물물교환으로 현금 가치를 키워나가는 모습은 현대 CEO적 면모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체적인 여성을 보고 싶어 하는 시대적 요구가 보편화되면서 <연인> 외에 수많은 작품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볼 수 있다. 다만 사극이기 때문에 캐릭터와 스토리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현대 서울 마포구에 살 법한 사람을 이름만 조선식으로 바꾸고, 의복만 한복으로 갈아입혀서 사극이라고 칭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극은 땅에 붙는 이야기와 인물을 구축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지루하지 않은 사극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면 갑자기 붕 뜨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장현과 길채의 캐릭터를 구축할 때 신중하려 했다. 물론 <연인>도 ‘비혼’ 같은 현대적 용어나 대중가요 <잘못된 만남>의 가사를 차용하기도 하지만 인물 중심에는 오롯이 조선 시대의 것만 남겨두려 했다.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설정도 중요하다. 우리가 어느 방향을 향해 깃발을 꽂을 것인지 명확해야 중심축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연인> 속 병자호란은 조선 조정이 정치 암투를 벌이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던 전쟁으로 방향을 잡았다. 청나라의 제2대 황제 홍타이지를 지적인 전략가로, 인조는 애초 무능했던 왕이라기보다 서서히 파괴돼가는 인물로 구축했다.

- 시대극으로서, 전시 상황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서 <연인>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로맨스가 되길 바랐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선택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쟁과 사랑’이었다. 시청자가 이 둘의 사랑을 따라가야 병자호란을 이해하고 포로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을 강렬한 격정이 살아 있도록 보여주고자 했다. <연인>이 불러일으킬 감정은 밝은 노랑이나 화사한 핑크가 아니라 역동성이 생생한 붉은빛이다. 그 격정이 살아날 때 두 사람이 오래 떨어져 있어도, 다른 공간에 있어도 시청자들이 애절한 마음을 응원하며 드라마에 동행하게 된다.

- 대개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안전한 실패를 주고, 치명적인 아픔이나 고난은 주변 인물에게 준다. 시청자의 이입 대상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포로로 끌려간 여성주인공을 보기 어려웠는데, <연인>은 그 시련을 길채에게 안긴다.

= 포로가 된 여자주인공을 조명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말을 보다 직접적으로 바꾸면, 적에게 욕을 당한 여자주인공을 조명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주인공 캐릭터가 작품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멋진 폼을 유지하는 길채가, 또 마음속에 뜨거운 사랑을 품은 아름다운 잡놈 이장현이 <연인>의 기획의도이고 주제이다. 길채는 <연인>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던 포로의 상징이다. 이역만리에 끌려가서도 씩씩하게 살아남길 선택한 포로의 모습을 길채를 통해 담아내고 싶었다. 필연적으로 길채는 포로로서 모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 너무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길채를 장현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끌어안는 과정을 통해 시청자들이 그 당시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파트2는 파트1에 비해 더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 인물의 위기를 보여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게 하기 위해 분위기 균형을 어떻게 맞추려 했나.

=비참한 상황을 감싸기 위해 무작정 웃음 코드를 넣거나 급격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기보다는 격정적인 사랑으로 몰아치는 고통마저 압도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길채가 선양에 끌려간 순간, 많은 시청자는 장현이 곧 길채를 구원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정된 여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길채가 납치되는 과정에 감정적 노선을 천천히 쌓아갔고, 마지막에 장현이 길채를 속환하는 순간 그간의 고통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만들고자 했다. 이 장면에 장현의 변함없는 사랑도 증명할 수 있었다.

- 장현을 향한 량음(김윤우)의 사랑은 동성애 코드를 담고 있다. 다양성을 반영하려 한 시도들도 인상 깊다.

=시대극이라는 제한이 있음에도 동성애를 다루고 싶었던 것은 과거에도 성소수자가 존재했고, 그들이 누군가를 계속해 사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물이 많은 사랑은 그 장애물의 높이와 단단함만큼 애절해진다. 나는 항상 간절한 감정에 이끌린다. 그런 것들을 마주할 때면 꼭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후반부엔 여건상 량음의 사랑을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그 깊고 간절한 감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 드라마는 궁극적으로 삶을 포기하지 않는,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이야기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나의 전작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아모개가 이런 말을 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이고, 싸울 일 있음 싸우는 것이고. 때 되믄 죽는 것이고….” 길채도 비슷한 태도를 지녔다. “나는 살아서 좋았어!” “밥이라도 먹고 죽을래?” 한마디로 이들의 마인드는 ‘태어났으니까 사는 건데 이왕 사는 거 잘 살자’에 가깝다. 길채는 장현이 죽을 줄 알았을 때에도 씩씩하게 차선책인 원무와 결혼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충실하게 이행한다. 길채는 사랑을 알지만, 사랑이 아닌 삶을 선택해도 그 삶까지 온몸으로 끌어안는 사람이다. 누이로 인해 상처받은 장현 또한 끝까지 살아내는 길채를 통해 치유받고 위로받는다. “끝까지 버티소서. 그것을 보면 소인, 오래전 삶을 포기한 이를 미워했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겠나이다.” 소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길채의 생명력으로부터 어떤 힘을 얻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을 잡놈으로 규정하던 사내가 사랑을 통해 생의 의지를 되살리고, 역설적으로 생을 던져 길채를 구한다. 이 사랑의 선순환 속에서 생명은 힘을 얻는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진 모든 인간에게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죽기 전까지 살아내야 하고, 사는 동안 많이 웃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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