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나리오의 저작자를 둘러싼 분쟁에 영화계가 술렁이고 있다. 지난 12월9일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SGK)은 영화사 F의 최OO 대표가 “윤색 정도에 지나지 않는 덧칠 작업을 해놓고 <심해> 시나리오에 대해 자신을 ‘단독 저작자’로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등록”했다며 이에 대한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SGK에 따르면 <심해> 문제의 발단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OO 문화재단이 진행한 공모전의 예심 심사위원을 맡은 영화사 F의 최OO 대표는 김기용 작가가 집필한 <해인>이라는 제목의 26페이지 분량 장편영화용 트리트먼트를 시나리오로 개발하자는 ‘작가계약서’를 7월19일 김기용 작가와 체결했다. 김기용 작가는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23일 <해인>을 기반으로 한 <심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최OO 대표는 “당신은 글재주가 없는 것 같다. 영화 말고 다른 업을 찾아보라”는 말과 함께 그해 12월13일 김기용 작가와의 계약을 중도 해지했다.
김기용, “최OO 대표는 <심해> 시나리오의 ‘단독 저작자’ 될 수 없어”
SGK와 김기용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의 쟁점은 ‘저작자’의 권리다. 저작자란 저작물을 ‘직접 창작한 자’를 뜻한다. 김기용 작가와의 계약 해지로부터 2주 뒤인 2018년 12월21일(최종등록 12월28일), 최OO 대표는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심해>의 단독 저작자로 등록했다. SGK 는 보도자료를 통해 “제작자의 위치에 있었던 최OO이 김기용 작가의 시나리오를 받아서 그 위에 직접 윤색을 가한 최OO 버전의 <심해> 시나리오를 만들어두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기용 작가가 단독으로 집필한 <해인> 트리트먼트에서 몇 가지 설정을 바꾸어 완성한 것이므로 최OO 대표가 <심해> 시나리오의 ‘단독 저작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김기용 작가는 “작가로 계약된 기간이었던 2018년 9월경부터 최OO 대표가 나에게 고지도 없이 개별 시나리오를 썼고, 내가 초고를 보낸 11월23일에야 11월22일에 쓴 것이라며 최OO 버전의 시나리오를 보내줬다”라고 회상했다. 2020년 10월경 최OO 대표와 <심해>의 공동 제작계약을 체결한 박은경 더 램프 대표는 “최초 계약 당시엔 최OO 대표가 <심해> 각본을 초고부터 다 썼다고 주장했다. 올해(2023년) 시나리오 검토를 위해 김기용 작가의 연락처를 최OO 대표에게 물었을 땐, 각본 관련 사안에 대해 헷갈렸으며 김기용 작가의 초고 이후에 본인이 트리트먼트부터 다 썼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올해(2023년)가 되어서야 최OO 대표가 <심해> 시나리오의 단독 저작자로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안 김기용 작가는 6월부터 법적 대응에 나섰다. 자신에게 저작자 등록에 대한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았고, 본 행위는 명백히 저작권법위반행위에 해당”하니 “<심해> 시나리오에 대한 영화사 F의 저작재산권을 반환하고 저작권등록을 말소”하여 자신을 “<심해>의 저작재산권자로 만들어달라”는 내용의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며 김기용 작가는 10월 초 최OO 대표를 민형사 고소했다. 그러나 12월4일 서울종로경찰서는 형사고소 건에 대한 증거불충분과 불송치(혐의 없음)를 결정했다. ‘최OO 대표가 김기용 작가보다 먼저 <심해>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최OO 대표에게 저작자 등록의 허위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는 게 이유였다. 12월11일에는 검찰이 불기소처분했다.
김기용 작가는 “경찰은 저작자와 저작권자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며 반박했다. “최OO 대표가 계약 해지 합의서에 따라 저작권을 양도 받긴 했지만, 저작자 권리는 나에게 있다. 게다가 SGK에 따르면 <해인> 트리트먼트의 내용이 나와 최OO 대표의 <심해>에 70% 이상 남아 있으므로 최OO 대표는 <심해> 시나리오의 단독 저작자가 될 수 없다”라는 의견이다.
SGK 또한 김기용 작가가 저작권을 침해당했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12월13일에 공개한 입장에선 “최OO 대표가 세 가지 불법행위를 자행”했다며 <심해> 시나리오의 단독 저작자 등록 외에도 “2019년 4월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사업화 지원사업에 김기용 작가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배제한 채 <심연>으로 제목을 바꿔 지원했다. 영화사 F의 작품으로 최종 당선돼 4천만원을 수령”했다며 철저한 확인을 요구했다.
최OO, “관행에 어긋나지 않는 계약”
최OO 대표는 SGK와 김기용 작가의 주장을 전면으로 반박했다. 먼저, SGK가 “<심해> 시나리오는 김기용 작가가 95%를 창작했고, 최 OO 대표의 창작 기여도는 5%에 머물며, 최OO 대표는 윤색보다 더한 크레딧이나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라고 판결한 것에 대해서는 “사안의 사실관계를 당사자인 나에게 교차 확인하지 않고 김기용 작가의 정보만을 취합해낸 편파적 결론”이라며 김기용 작가가 제기한 의혹에 대해 6시간 동안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고, 증빙 자료와 진술서, 법리 의견서로 진실을 소명하여 불송치, 불기소 결정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작가와 계약했음에도 별도로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마감 기한이 촉박한 상황에서 김기용 작가의 트리트먼트, 시나리오 작업 결과를 심히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글은 통상적인 양식보다 분량이 많았고 형식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심해> 최종 트리트먼트에 기반하여 내 버전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용 작가보다 먼저 11월22일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단 사실은 당시 메일과 회사 업무 문서로 증빙”한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관행에 어긋나지 않는 계약서”를 썼으며 “계약 해지 합의서엔 초고까지의 작업에 대해 각본 크레딧과 인센티브를 보장해준다는 항목”도 넣었기에 김기용 작가의 권리를 침탈하려던 적이 없단 의견이다.
2018년 12월경 <심해> 시나리오를 단독 저작자로 등록한 일에 관해선 “일부러 김기용 작가를 배제하려던 것”은 아니며 “지역 영상위원회에 정산 보고를 하기 위해 급히 저작권등록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작가 계약 해지서에 저작권 양도 부분이 있었기에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했다. 또한 “영화업계에서 실효성 있는 ‘저작자’의 권리란 작가 계약서와 작가 해지 계약서에 보장하는 것”이라며 “온라인 저작권 등록은 그 자체로 법적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계약서에 영화의 각본 크레딧을 명기한다는 것은 이미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김기용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2020년 10월 더 램프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 대해서는 “더 램프에 시나리오 초고를 썼던 작가의 존재를 설명”했다며 김기용 작가의 의견에 반론했다. 최OO 대표는 증빙 자료로 2020년 10월9일에 박은경 더 램프 대표에게 보낸 메일 캡처본을 제시했다. 메일엔 “크레딧 관련해서 설명해드릴 말씀이 있다. (중략) 초고까지 같이 작업을 진행했으나 잘 이야기하여 계약을 중도 해지했고, 엔딩 크레딧 각본으로 올려주겠단 선으로 끝냈다. 제가 원안자는 아니므로 기획 크레딧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관해 최OO 대표는 12월16일 SGK 등 관련 단체에 <심해> 시나리오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중단 건을 통고했다. 최OO 대표의 통고서에 반발해 12월19일 김기용 작가는 입장문을, 더 램프는 답변서를 작성했다.
최OO 대표는 “<심해> 건은 1인 제작사(영화사 F)와 대형 제작사(더 램프)간 힘의 불균형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영화계 저작권 분쟁은 사안에 따라 억울한 주체가 다르다”라며 “이 사안을 크게 분쟁화해 실익을 노리는 사람들의 욕망”이 있다고 주장 했다. 또한 “더 램프가 의도를 지니고 내 과거 행적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내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라고 대응하기도 했다.
한편 최OO 대표는 분쟁에 대한 소명을 위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에 가입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계자에 따르면 “논란 중인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가입시키는 일은 자칫 협회가 특정 의견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협회가 지금은 가입을 반려했으며 이후 상황을 지켜보겠다”라고 밝혔다.
최OO 대표 저작권 침해 논란 처음 아니다
<심해> 논란이 불거지며 최OO 대표가 과거에 작가의 권리를 침해했단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영화 <모럴해저드>의 각본가인 박현우 작가는 “최OO 대표가 <모럴해저드>의 시나리오 문제로 나와 제작사더 램프를 기만, 기망”했다고 주장했다. 박현우 작가는 2018년경 최 OO 대표와 작가 용역을 맺고 <모럴해저드> 시나리오를 2고까지 쓴뒤 2019년에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 최OO 대표는 <모럴해저드> 시나리오를 수정하여 더 램프에 판매했고, 영화의 연출을 맡아 올해 촬영을 마쳤다. 박현우 작가에 따르면 “최OO 대표가 더 램프에 <모럴 해저드> 시나리오를 판매할 당시 본인의 시나리오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조사해온 김병인 SGK 대표는 “올해 7월 <심해> 건을 겪던더 램프가 최OO 대표에게 <모럴해저드> 시나리오의 창작 경위를 물었다. 이때 최OO 대표는 박현우 작가가 각본을 썼음을 언급했고, 이로써 박현우 작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더 램프가 박 작가에게 연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램프의 연락을 받은 박현우 작가는 “내 작업에서 소재가 바뀐 것이고 이야기가 바뀌진 않았다”라고 주장했고, 더 램프는 SGK에 크레딧 조정을 의뢰했다. SGK는 “박현우 작가가 원안 및 각본, 최OO 대표가 제2각본가라고 판결”했다. 더 램프는 “SGK의 의견에 따라 제작을 이어갈 예정”이다. 박현우 작가는 “계약 해지 후에 최OO 대표가 시나리오를 수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심해>를 포함해 작가의 원저작물이 타인의 온전한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영화계 일들은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현재 <모럴해저드>의 저작자는 더 램프와 영화사 F로 등록돼 있다. 이에 최OO 대표는 “더 램프가 김기용 작가에게 연락해 오해를 조장했듯 <모럴해저드> 논란 역시 더 램프가 작가와의 관계를 이간하는 방식으로 증폭”했다고 주장했다.
제작자 L씨는 “과거에 최OO 대표가 각본을 쓰고 제작했던 영화 <S> 에도 비슷한 시비가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L씨는 2000년대 중반 부터 영화 <K>를 기획하고 제작을 준비했다. 최OO 대표는 당시 <K> 의 제작 준비를 도왔다. <K>를 완성하지 않고 잠시 영화계를 떠나 있던 중, L씨는 “최OO 대표가 제작 중인 영화 <S>의 시나리오가 <K>와 유사”하다는 제보를 들었다. L씨는 <S>의 시나리오를 읽었고 “<K>가 <S>의 주요 설정을 그대로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L씨는 법적 대응을 포기했다. “변호인에게 대사나 지문이 같아야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고, 설정만 유사하다면 법적 처분이 어려울 수 있단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S>의 엔딩 크레딧에 ‘<K>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라고 명시하는 정도로 “최OO 대표와 합의”했다고 회상했다. L씨는 “<S>의 각본가였던 U씨가 억울함을 표출”했었다며 “도덕적 해이를 방치한 업계의 잘못이며, 그때 바로잡지 못했던 내게 원죄”가 있다고 토로했다. 현재 영화 <S>의 저작자는 최OO 대표로 등록돼 있다.
<심해>와 <모럴해저드> 논란을 둘러싼 저작자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L씨와 박현우 작가는 <심해> 저작권 침해 건에 대한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반발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김기용 작가는 민사소송과 예술인신문고를 통해 조치를 이어갈 예정이다. 최OO 대표는 “올해 10월경 <심해> 분쟁에 대한 중재를 영화인신문고에 접수”했으나 김기용 작가가 “민형사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므로 유보 조건에 따라 조사 유보를 신청”했다. 최OO 대표는 “영화인신문고를 통한 해결”을 바란다며 조사의 속개를 요청해둔 상황이다. L씨는 “법적 해결의 여지가 있는 <심해>가 좋은 선례가 되어야 한다”라고 전했다. <심해> 시나리오 분쟁의 공소시효는 최OO 대표가 저작자로 등록한 지 5년째 되는 올해 12월2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