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장소 바꾸기에 주목하기, <외계+인> 2부
2024-01-31
글 : 김성찬 (영화평론가)

최동훈 감독 하면 두 가지를 자주 말한다. 하나는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대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다수를 포함해 예사 영화보다 더 많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등장인물의 앙상블이다. 그러나 <외계+인> 연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품은 장소에는 관심이 적었단 생각이 든다. 더 정확히는 다양하게 꺼내고 빈번하게 바꾸는 장소를 바라보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이건 단순히 하이스트 영화라면 여러 인물 군상을 드러내고 강탈 과정을 풀어내느라 필연적으로 많은 장소를 제시할 수밖에 없어서는 아니다. 그의 영화는 직관적으로 땅으로 인식되는 곳에 국한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대상도 장소로 삼는다. 또 그가 잘 구현하는 활극은 장소를 관장하는 주체인 인물이 장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웅을 겨루는 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달리 보면 그의 영화만큼 장소 대결이 이뤄지는 각축장도 없다. 대결 양상은 다름 아닌 점유와 점거, 퇴각과 이탈이다.

<외계+인> 1부 시작에서 그간 감독의 작품 속 장소 이미지가 내비친 야심이 우주까지 번져나간 걸 목격한다. <타짜>의 고니(조승우)를 앞세워 전국을 누볐고, <전우치>에서 도술을 바탕으로 극적인 장소 변환을 꾀했기에 더욱 확장한 장소성을 드러내려면 우주 공간의 도입은 정해진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다른 점이라면 <타짜>에서 전국을 순회하던 장소는 <도둑들>에서 홍콩, <암살>에서는 만주와 같이 점차 수평으로 영역을 넓힌 데 비해 <외계+인> 연작은 우주(위)에서 지구(아래)로 수직 관념을 동반한다. 다시 말해 최동훈 감독 작품에서 장소가 주로 옆으로 나열된 후 소거됐다면 <외계+인> 연작은 수직의 통로를 거치는 방식을 더하는 것으로 장소 바꾸기의 확장성을 도모한다. 이것도 부족했는지 작품은 시간 여행을 장소 전시의 묘안으로 이용한다. 같은 장소라도 시간을 달리하면 다른 장소처럼 여겨진다. 시공간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지만 시간과 공간은 어떤 면에서 같은 말이다. 시간이 달라졌다는 건 공간이 다르다는 말과 다르지 않고 공간이 달라지면 때로 시간마저 다르게 흐른다. <외계+인> 연작의 서사는 시간의 선형성에서 탈피하라고 말하지만 관객이 이 선형성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고려 시대와 2022년을 오가는 <외계+인> 연작의 시간 여행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높고 낮음이라는 위치 차이의 수직 관계에 은밀히 의지한다.

한 가지 더, <외계+인> 연작에서 외계 존재의 감옥으로 기능하는 신체도 인간과 외계인이 점유율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 또 다른 장소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사람의 몸은 최동훈 감독 작품에서 장소 바꾸기의 관념을 구축하는 기초가 되고, 같은 존재 다수를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보여주더라도 관객이 각 개체를 고스란히 인지하도록 드러내는 걸 특징으로 한다. <범죄의 재구성>의 쌍둥이 형제 설정, <전우치>에서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존재인 과거와 현재의 인경(임수정), 그리고 전우치(강동원)의 분신들, <암살>에서 안옥윤/마츠코의 쌍둥이 자매(전지현), <외계+인> 연작에서 썬더가 취한 다수의 가드(김우빈) 형상 등이 장소 바꾸기의 쾌감을 신체라는 의외의 바탕에서 발동시킨 기법으로서 그렇다. <외계+인> 연작에서 더욱 변주한 면이 있다면 인물의 어린 시절과 성장한 후의 모습을 병치하는 일이다. 또 같은 존재의 다른 면모로서 장소가, 조상인 능파(진선규)와 후손인 민개인(이하늬)으로 DNA를 연결고리 삼아 600년의 시간 폭에 걸쳐 넓혀지기도 한다. 대상을 복제하는 외계 프로그램 썬더가 우왕(신정근)과 좌앙(이시훈)이라 이름 붙인 인간이자 고양이인 그 무엇으로 변하는 건 장소로서 신체가 지닌 가능성을 무한까지 넓힌 경우다. 무엇보다 다뉴세문경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삼각산 신선 흑설(염정아)이 활용하는 이 청동거울을 통과한 신체는 마치 상이한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세계로 빠져든 것처럼 거대하게 증폭된 크기로 탈바꿈해 전시된다.

종횡으로 확장하고 시간과 신체마저 장소화한 <외계+인> 연작에선 여전히 인물이나 집단간 점유와 점거, 퇴각과 이탈이 뒤섞인 장소 쟁탈전이 벌어진다. 외계 죄수는 엄연히 자기 구역이 아닌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자기 행성의 대기 ‘하바’를 터뜨리려 하거나 각성한 뒤 인간 신체를 점령하려 한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자기 땅과 신체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이 과정에서 부분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자기 장소에서 퇴각하거나 이탈하지만 신고 끝에 재점유를 달성한다. 영토에 관해서라면 <암살>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일제는 말 그대로 조선을 강점했고, 독립투사는 고국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현실에선 청산되지 못했지만 <암살> 마지막 장면에서 염석진(이정재)은 결국 처단되면서 상상과 상징으로나마 순리에 이른다. 여기서 설사 장소를 향한 대결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엔 순리로 돌아가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특히 이건 픽션 바깥의 역전된 상황과 결부해 생각해볼 만하다.

<외계+인> 1부 개봉 후 관객이 보인 시큰둥함과 일부의 혹평은 작품이 여러 장르를 무리하게 혼합했다고 여기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작품을 옹호한다면 이러한 반응에는 장르에 관한 관객의 정서적 장소라 할 법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한몫했던 것 같다. 하나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외계 죄수의 우주선이 서울 종로 거리를 파괴할 때 만약 관객이 모종의 낯간지러움을 느낀다면 저 거리의 광경에선 우주선의 활공과 전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이지 않을까. 외계인 침공을 다룬 유수의 영화가 기원한 곳이 서양이고 거기는 관객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한국의 풍경에서 그러한 장면은 심리적 장벽에 부딪힌다. 한국은 SF 불모지, 한국 SF의 저열한 작품성 등의 평가는 어쩌면 의식하는 일 없이 특정 장르의 정체성을 어딘가에 고정해두고 순리라 여긴 탓일 우려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작품이 품은, 홍콩이 고향인 도술과 무협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처럼 어딘가 어긋나 불화를 일으키는 심적 순리는 작품이 둘로 나뉜 형태에도 기승을 부린다. 하나를 둘로 나눠 시간차를 두고 공개한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경험이 없진 않지만 드물다. 한 차례 관람으로 영화를 이해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면 관객은 부담을 느낀다. 작품을 정복하는 데 영화관 좌석이라는 장소를 재점유해야 하는 수고를 들인다. 지난 시간만큼 희미해진 기억을 복구하는 데에도 힘을 써야 한다. 영화와 관객이 벌이는 장소 쟁탈전이다.이렇게 말하고 나니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최동훈 감독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자주 바꿔 보여주는 여러 장소와 여기서 발견하는 점유의 강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더 골똘히 생각해보게 된다. <외계+인> 연작 중 특히 1부에서 서울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들을 보면서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오른다. 저렇게 많은 건물 중에 내 것 하나가 없다는 한탄. 인간에게 몸 누일 자기 공간을 향한 욕구는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공간 부족은 여전하다. 정말 공간이 불충분하다기보다 편중돼 있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니 강박적으로 장소를 탐하게 된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공간을 욕망한다. 식탐이 있다면 처탐(處貪)이라는 말도 가능할까. 종횡하고 시간과 신체까지 장소화한 <외계+인> 연작에서 빈번하게 전환해 제시하는 장소는 시감각을 도구 삼아 처탐 충족의 원리에 복무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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