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누구나 선악을 동시에 품고 산다, <데드맨> 하준원 감독
2024-02-13
글 : 박수용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이름을 팔아 타인의 책임을 떠맡는 바지 사장 이만재(조진웅).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그의 여정은 자기 몫의 책임에 대한 이행을 의미한다. 하준원 감독에게는 장편 데뷔작 <데드맨>이 그의 두 번째 이름과도 같다. 5년이 넘는 지난한 취재 과정과 개봉 시기 조율을 위한 1년여의 기다림, 관객에게 취향을 강요하는 대신 그들의 입맛을 이해하려는 겸허한 시도 모두 작품에 대한 그의 온전한 책임감의 고백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하기도 한 하준원은 숨가쁜 직설과 묵직한 은유로 벼린 이야기 <데드맨>을 통해 자신의, 그리고 동시대의 책임의 무게를 가늠한다.

- 그간의 장르적 도식에서 기능적 역할로 소비되던 ‘바지 사장’을 주인공이자 핵심 소재로 삼은 점이 신선하다.

= ‘이름값’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했다. 어느 순간부터 각자의 몫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를 마주하며 과연 우리가 자신의 이름값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업체에 자신의 이름을 파는 바지 사장의 세계를 떠올렸다. 자료조사 중 특이했던 점은 외국에는 바지 사장과 정확히 호응하는 개념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이지 않은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적합하면서도 관객에게 너무 낯설지 않은 소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 사건의 범인을 찾는 후더니트 구성을 취하지만 선악 구별이 명쾌하지는 않다. 이만재 또한 떳떳하지 못한 일임을 인지한 채 바지 사장 업계에 뛰어든다.

= 앞서 문제의식을 느낀 사회현상의 원인을 되짚어봐도 좀처럼 하나로 귀결되지 않았다. 개인의 욕망과 권력, 자본 등은 언제나 깊게 맞물려 있지 않나. 반동 인물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대결구도보다는 서로 물고 물리는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싶었다. 이만재도 저축은행 사태를 겪으며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린 면이 있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선악을 동시에 품고 산다는 점에서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생각한다.

- 그런 점에서 이만재의 표정은 그간 조진웅이 스크린에 펼친 연기적 스펙트럼이 집약되어 있는 듯 다채롭다.

= <공작>에서 보여준 조진웅 배우의 드라이한 연기를 좋아한다. 특유의 기개 뒤의 짙은 황량함이 비치는 정이품송 같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속을 알기 힘든 입체적인 인물을 감정적으로나 외양적으로나 훌륭하게 소화해줬다. 상대역인 김희애 배우도 촬영 중에 “당신(조진웅) 좋겠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한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배우로서 부럽다”고 표현한 적 있다.

- 이만재는 유독 넥타이에 집착한다. 숨겨진 의미가 있나.

=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친구들을 취재해보면 넥타이를 유니폼같이 생각하더라. 만재는 평생을 무언가를 팔며 살아온 인물이다. 자연히 넥타이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은 영화에 포함되지 않은 촬영분 중 넥타이가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되는 장면이 많다. 일례로 비행기 안에서 심 여사(김희애)와 이만재가 대화하는 장면 뒤로 넥타이 여러 개가 진열되어 있다. 원래는 이만재에게 직접 넥타이를 고르게 하는 대사가 있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덜어냈다.

- 넥타이와 같은 상징물이 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한다면 인물의 운명을 점지하는 것은 주제의식과도 상통하는 이름의 의미다.

= 나도 아들이 있어 알지만, 시나리오 쓰는 사람도 배역 이름을 한참 고민하는데 부모님이 자식 이름을 지을 때는 얼마나 더 고민이 깊겠나. (웃음) <데드맨>의 인물들은 각 이름의 좋은 뜻과 정반대의 운명 속에서 개인이 품었던 꿈과 철학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관객들이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의 가치만큼 잘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 하나만 해주어도 성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 전반적으로 한 템포 빠른 컷 편집과 속도감 있는 전개가 돋보인다.

= 영화의 전반적인 템포, 특히 초반의 리듬을 속도감 있게 끌고 가자는 생각을 안고 작업했다. 트렌드에 대한 편집감독의 조언도 주효했다. 대중영화를 제작하다 보니 더 빠른 호흡의 영화를 선호하는 시장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빠른 전개 속에서도 관객들이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공을 들였다.

- 심 여사가 등장할 때마다 극의 공기가 달라진다. 대사의 호흡도 길어지고 촬영을 차분한 롱테이크로 전환하기도 한다.

= 심 여사와 이만재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호흡도 정반대로 설계했다. 미국의 여러 정치 컨설턴트를 모델로 삼았는데, 청중을 사로잡는 지휘자 같은 카리스마를 구축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김희애 배우 특유의 품위 있는 연기가 아주 적절했다. 롱테이크는 김희애 배우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가속하는 시대의 템포 속에서 더 긴 호흡의 테이크를 남기고 싶다는 영화적 고집을 지킬 수 있어 즐거웠다.

- 두 세계의 대비를 표현하기 위한 미술적 노력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오히려 한국에서 더 재밌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설 감옥을 촬영한 곳은 부산의 폐쇄된 동물검역소다. 가축우리에 인간들이 갇혀 있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심 여사는 명도 높은 백색 공간 속 검은 코트를 입은 인물로 그려냈다. 스토리를 축약하자면 이만재가 권력층의 실체에 점차 다가서는 스무고개와 같다. 폐건물, 호텔, 클럽 등 서사가 경유하는 공간들이 최대한 다채로운 감각을 줄 수 있도록 설계했다.

- 2007년 <씨네21>과의 인터뷰([하상원, 하준원] ‘영화에 미친 남자’의 아들들)에서 부친인 하명중 감독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데드맨>에 담긴 사회비판적 시선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지.

= 항상 스스로 느낀 것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면서 작품을 만들지만, 아버지의 작업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향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작품 속 메시지가 너무 세게 느껴졌었다. 성장 후 아버지의 <태>를 다시 봤는데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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