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대낮에 서울 아파트의 거실에서 낮잠을 자던 은심(나문희)은 고향 남해의 청보리밭 풍경과 돌아가신 엄마 꿈을 꾼다. 때마침 어린 시절의 친구 금순(김영옥)이 은심을 찾아와 둘은 함께 남해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60년 전의 친구 태호(박근형)와 은심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마주한다. <와니와 준하>(2001), <분홍신>(2005), <더 웹툰: 예고살인>(2012)을 연출했던 김용균 감독은 <소풍>으로 인생의 황혼 녘에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는 70대의 은심, 금순, 태호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친다. 영화 안팎에서 그가 경험한 삶과 죽음으로 천천히 매만지고 다듬어왔을 생각들을 김용균 감독은 활자에 눌러 담기 벅찰 만큼 들려주었다.
- 수많은 이야기에서 노인은 주변부를 장식한다. <소풍>은 60년이 흐른 뒤에 고향에서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는 노년의 삶을 한가운데 놓고 다루는 영화다. 이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는.
=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그 점이 신선했다. 하지만 신선하다는 건 현실적으로 투자받기 어려운 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원동력은 개인적 끌림이자 경험이었다. 부모님의 노환과 죽음을 겪으면서 죽음이라는 건 멀리 있는 당신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 문제이기도 하다는 걸 크게 느꼈다. 처음 제목은 ‘가지 마오’였는데 제작자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떠올랐다고 해 지금의 <소풍>이 되었다. 제작진이 영화 제목으로 한참 고민했다. ‘소풍’을 검색하면 ‘김밥’ 이런 것밖에 없고(웃음), 망설였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 단어 하나로 내가 어떤 태도로 이 영화를 연출하면 좋을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세명의 베테랑 배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연기 앙상블이 관객에게는 편안하지만 현장을 지휘하는 연출자로서는 어려웠을 점이 먼저 상상되는데.
= 걱정됐다. 처음에는 어떻게 연출할지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대본 리딩을 하러 배우들이 모였을 때 캐릭터는 거의 완성이 되어 있었고, 아닌 척하지만 이미 어떻게 연기하겠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배우들이 지나온 나이인 70대를 연기하기 때문에 경험에서 비롯된 배우들의 통찰과 50대인 나의 어림짐작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뭔가 끌어내기 위한 연출을 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관객의 마음으로 연기를 보고 솔직한 느낌을 잘 전달해보자 마음먹었다. 이런 소통 과정에서 내 막내 기질을 믿었던 것도 있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이분들은 내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촬영 회차가 쌓여가면서 의견을 나누는 데 서로 조금씩 편해진 부분도 있다. 베테랑 배우들이라 촬영이 대부분 한두번 의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고, 그런 현장 자체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세 주인공의 과거와 추억을 지금으로 계속 불러낸다.
= 흔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어려진다고 말한다. 신체가 노쇠해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어려진다는 의미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마음이 더 젊어진다고 할까.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세파에 시달리지 않았던 순수함을 떠올리면서 그때로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해에서 세 배우와 영화를 촬영하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 세 주인공의 아들과 딸들의 삶도 골고루 비춘다. 나이가 들었어도 자식들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 애초에 이 영화 각본이 은심의 아들 해웅(류승수)의 시선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각색하는 과정에서 은심과 금순이 중심에 놓이게 된 거다. 나로서는 시나리오의 방향이 바뀐 게 좋았는데 원안에서 워낙 비중 있는 캐릭터다 보니 아들의 존재가 양날의 검이 되었다. 해웅을 아예 없애서도 안되었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서사가 나와도 안되었다. 노인들에게 자식은 중요하니 어느 정도 필요한 역량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중으로 균형을 잡는 데 상당히 오래 공을 들였다. 자식들이 가업을 잇거나 사업에 실패하고,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어 하는 현실적 문제는 노인들의 개인적이고 사소한 삶을 드러내는 부분과의 균형을 고려한 결과다.
- 금순의 방에서 은심과 금순이 나란히 누워 있거나 부엌에서 목욕하는 장면의 카메라 위치가 낮다. 이렇게 촬영한 이유는.
= 남해에서의 촬영은 핸드헬드로 찍었다. 남해로 가는 순간부터 카메라를 많이 움직여서 생동감을 주자는 촬영감독의 의견에 공감했다. 금순의 집으로 나오는 공간을 빌려서 리모델링하긴 했지만 세트장에서처럼 카메라가 자유롭게 오갈 수 없었다. 집 안의 상황에 맞춰 어떻게든 찍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이르렀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낮은 앵글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 나중에 주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배우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의도에서 탄생한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 천연 염색을 한다거나 금순의 반지에서 풍기는 예스러움, 금순이 은심에게 차려주는 밥상에서 힘주지 않은 소박한 우리네 정서가 물씬 풍긴다.
= <한국기행> 같은 다큐멘터리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귀촌한 분들이 천연 염색을 곧잘 하더라. 또 영화에서 의미가 있는 해당화 꽃물로 천을 물들이는 설정을 영화에 가져오고 싶었다. 반지는 오롯이 김영옥 선생님의 아이디어다. 평소에도 그런 반지를 많이 끼시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반지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주셔서 반영했다. 그 시절 어른들에게는 당신 것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거의 없지 않나. 그러니 반지 하나조차도 굉장히 소중한 나만의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밥상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지키고 싶었다. 요리 연구가를 불러서 밥상을 조금 더 예쁘게 잘 차릴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금순이 은심에게 차려주는 밥상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보이기를 바랐고 우리가 먹는 진짜 집밥으로 보이고 싶었다.
- 이번 영화를 통해 특별히 바라는 점이 있다면.
= 운 좋게도 지금 같은 귀한 상황이 되었다. 결과에 대한 기대보다는 많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어떻게 늙는 것이 좋은지, 죽음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개인적 경험에서도 이런 대화는 나누는 게 바람직하다. 세상에 나온 뒤부터 작품은 창작자의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어떤 말을 나누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관객들이 이 영화로 죽음 이전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