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타티나 빅토르 에리세만큼은 아니지만 알렉산더 페인 또한 과작(寡作)의 감독이다. 단적인 예로 그는 <사이드웨이>(2004)로 오스카 각색상을 수상한 이후 차기작 <디센던트>(2011)로 또 한번 오스카 각색상을 받았는데 두 영화는 7년의 간격을 두고 탄생했다. 지금 전세계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바튼 아카데미>와 페인의 역대 연출작 중 가장 모호한 평을 들은 전작 <다운사이징>(2017) 사이에도 6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드문드문 영화를 만드는 페인이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 스크린을 찾아도 유사하게 반복되는 화소로 가득하다.
중년 백인 남성들의 수호자
로라 던이 루스로 분한 <시티즌 루스>(1996)를 제외하면, 알렉산더 페인은 한결같이 중장년 백인 남성이 주연인 영화를 만들어왔다. 평단과 관객 모두가 트레이시(리즈 위더스푼)의 맹활약을 이야기한 <일렉션>(1999)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일렉션>은 냉철히 보면 유능하나 좋은 교사는 못 되는 짐(매슈 브로데릭)만이 유일하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가감 없는 속내를 드러내도록 허락한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개 생애주기적 위기에 놓여 있다. 이들이 느끼는 걱정과 불안은 성취의 한계를 자각하는 데에서 연원한다. 중년의 위기를 다룬 대표 영화로 거명되는 <사이드웨이>를 떠올려보라. 오크통에 빠져 사는 마일스(폴 지어마티)의 인생이 걱정돼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와인과 우울증 약에 의존해서만은 아니다. 마일스는 곁의 사람들로부터 끝없는 인정을 갈구하지만, 어떤 도전도 감행하지 않은 채 지나간 일들에 불안만 누적하다 모든 관계를 도피로 귀결하기 때문에 위험한 남자였다. 페인의 남자들이 처한 위기의 시작은 반려자의 외도다. <디센던트>의 맷(조지 클루니)은 코마 상태에 빠진 아내가 이웃과 공공연한 불륜 관계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잠시 제동을 건다. <어바웃 슈미트>(2002)의 워런(잭 니콜슨) 또한 사별한 아내(준 스큅)와 동네 친구가 연정을 나누었단 사실을 깨닫고 불현듯 지난 삶을 돌아본다. <다운사이징>의 폴(맷 데이먼)은 아내 오드리(크리스틴 위그)가 개인의 이기심을 이유로 종적을 감추자 삶이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사이드웨이>의 마일스는 이혼한 전처의 재혼 소식을 듣자마자 투기에 휩싸여 음주 행위에 박차를 가한다. 이 일관된 설정은 페인의 성편향성을 지적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페인의 영화 속 여성들은 성적으로 방종해 사망하거나 떠나고, 그들의 부재는 중년 남성 주동 인물에게 인생 각성의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인 남성들은 하나같이 사립학교 교사(<일렉션> <사이드웨이> <바튼 아카데미>), 보험사 임원(<어바웃 슈미트>), 토지 상속을 받은 변호사(<디센던트>) 등 적정한 부를 누릴 수 있는 화이트칼라 직업에 종사한다. 이들이 하는 실존적 고민은 부르주아적 불만으로 비칠 여지가 짙다.
백인 엘리트 감독 알렉산더 페인이 자신의 중년 백인 남성주인공들을 가련히 여기는 것은 명백하다. 페인조차 이 남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작가적 자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인은 이들 남성을 무작정 비호하려 들지도 않는다. <바튼 아카데미> 속 남학생들의 ‘가부장’을 자처하는 폴(폴 지어마티)은 영화의 마지막 20분을 제외하면 한결같이 심사가 고약하다. <일렉션>에서 목소리를 허락받은 짐은 커리어의 정점에서 추락의 악화일로를 걷는다. <사이드웨이>의 마일스는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 모두가 극단으로 치달은 나르시시스트임이 매 대사에 드러나고, <어바웃 슈미트>의 워런이나 <네브래스카>(2013)의 우디(브루스 던)가 보이는 인생 말년의 희망은 안타까울지언정 그들은 가족구성원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하는 아버지로 여생을 보낼 것이 자명하다. 페인이 그리는 뒤틀린 남자들의 속사정 또한 마냥 감싸고 도는 방식으로 스토리텔링되지 않는다. 이들의 전사는 언제나 간접적인 방식인 문학(글)을 통해 형상화된다. 워런의 지난날은 그가 후원하는 탄자니아 소년을 향한 편지로, 마일스가 겪은 비극은 훗날 그의 소설 초고를 읽은 마야(버지니아 매드슨)의 후기를 통해 은근히 표현될 뿐이다. 우디의 박복한 가족사는 희곡의 독백이나 뮤지컬의 쇼스토퍼 넘버처럼 쓰인, 평생 남편과 싸우며 해로한 아내 케이트(준 스큅)의 긴 신세 한탄으로만 짐작 가능하다.
길 위에서 바라본 미국 사회
<바튼 아카데미>가 공개된 후 평자들은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목록을 재소환했다. 사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는 늘 1970년대 미국영화의 자장 아래 있었다. 우선 페인 자신이 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페인의 영화는 <이지 라이더>(1969)나 <내일을 향해 쏴라>(1969)로 대표되는 뉴 할리우드의 로드무비와 닮아 있다.
상극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함께 미국 횡단길에 오르며 대자연의 풍광 아래 서로를 그리고 삶에서의 자기 위치를 차츰 이해해간다. 관객이 익히 알고 있는 미국 로드무비의 공식이다. 이는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제목이 곧 영화의 정체성인 <네브래스카>는 과장광고일 것이 빤한 100만달러의 복권 당첨금을 수령하려는 외골수 아버지와 그를 평생 납득하지 못하는 아들 데이비드(윌 포트)의 네브래스카주 횡단기다. <바튼 아카데미> 후반부의 주요 사건은 방학 내내 으르렁거리며 다투던 교사 폴과 학생 앵거스(도미닉 세사)의 보스턴 배낭여행이고, <사이드웨이>의 두 친구 또한 1주일에 걸쳐 미국 서부의 와이너리를 순회한다. <어바웃 슈미트>의 워런은 <스트레이트 스토리>처럼 홀로 캠핑카에 몸을 싣고 예비 사위의 집으로 향하고 <다운사이징>의 폴은 그만 스케일이 커져 노르웨이로 떠난다.
로드무비의 내러티브는 캐릭터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잠시 일탈하게 둠으로써 당대 사회가 당면한 주요한 문제들을 관조하게 만든다. 환경과 계급론을 직설적으로 규탄한 <다운사이징>은 말하면 입만 아프다. <어바웃 슈미트> <디센던트>에서 불완전 가족의 화합 활로를 모색한 알렉산더 페인은 <바튼 아카데미>에선 유사가족을 통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불합리성을 드러내고, 고급 기숙학교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통해 계급과 인종의 상관성을 지적한다. 70년대 영화를 향한 희구와 이에 사회의 갈급한 문제를 접목하려는 페인의 창작론은 그의 구술에서도 언급된다. 한때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페인은 <사이드웨이> 개봉 당시 “1970년대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영화가 자주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를 반영하고 진짜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버라이어티>)라고 성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