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 <사바하>로 쌓은 장재현이란 브랜드는 <파묘>의 초기 흥행을 견인했다. <파묘>는 다시 한번 평단과 대중에 장재현의 이름을 각인하고 있다. 하지만 각인이란 양날의 검이다. <파묘>의 오컬트 요소는 “장재현 감독답다”라는 너른 호응을 부를 수도 있지만, 전작의 연장선에서만 해석될 위험성도 있다. 그렇기에 장재현 감독은 <파묘>를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려는 태도”로 만들었고 결과물로 증명했다. <파묘>가 보여준 직진의 서사와 ‘험한 것’의 돌출적인 등장, 풍수사와 같은 새로운 직군의 존재감은 취향의 호오를 떠나 장재현식 세계관의 새 영역을 열었다. 한 감독이 주조한 고집과 변주의 삽질에서 <파묘>가 불쑥 드러났다.
* 인터뷰에 <파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파묘>의 첫 부분은 화림(김고은)과 상덕(최민식)의 내레이션이다. 무당이란 직업이 “음과 양, 과학과 미신 사이”에 있다는 화림의 말에 따라 화림의 얼굴 한편에만 빛이 드는 연출이 두드러진다.
= 첫 챕터의 제목이 ‘음양오행’이지 않나. 무속인들은 ‘음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상덕과 영근(유해진)은 “오행 좋잖아. 오행” 같은 대사를 친다. 인물마다 빛도 다르게 써서 캐릭터를 딱 구분하고 싶었다. 상덕과 영근의 첫 등장 때는 햇빛을 완전히 역광으로 써서 얼굴을 시커멓게 그림자 지게 했다. 이 둘은 조금 음침하게 등장시키고 싶었다.
- 상덕의 초반 내레이션 중에 “미신이다. 사기다. 다 x까라 그래”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이건 상덕의 태도이면서 <파묘>라는 영화와 감독의 태도 같기도 했다. 무리수 같은 부분이 있더라도 뒤돌지 않고 달리는 영화니까.
= 맞다. <파묘>를 만드는 내 의무적 태도였다. 영화가 중간에 덜그럭거리기도 하고 구조도 좀 독특하다. 평범하고 매끄러운 유령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필모그래피에 발전이 없을 것 같았다. <파묘>로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몇 가지 부분들은 그냥 멱살잡이하다시피 끌고 가려 했다.
- 결과물과 개봉 후 반응을 보고 나니 한 발짝 나아간 것 같은지.
= 글쎄. 우선 스스로 느끼는 태도의 측면에선 그럴지도 모르지. 외부 의견에 위축되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 안 보고 그냥 화끈한 영화 하나를 만들려 했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완성해냈단 생각은 든다. 지금껏 안 해본 새로운 장면들을 넣으려 노력한 건 확실하다. 후반부에 험한 것이 나오면서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갈리긴 하겠지만 그거야 내 손을 떠난 거고.
- 화림과 봉길의 이름이 독립운동가의 이름이라거나 상덕의 차 번호가 0815(광복절)라는 등의 세세한 설정들, 화림의 컨버스나 봉길의 에어팟 맥스 등이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고 있다.
=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단 말씀을 드리고 싶다. 사실 앞의 작품들도 다 그런 식으로 이스터에그나 여러 레이어를 쌓긴 했고 이번에도 하던 대로 했던 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흥행이 좀 잘되어서인지 더 많이 드러나게 된 것 같다. 서성경 미술감독이나 다른 제작진과 여러 작품을 만들다 보니 서로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여러 도움을 얻게 됐다. 감독이 헤매고 있으면 와서 혼도 내고 그런다. (웃음)
- 화림과 봉길의 관계성도 흥미롭다. 봉길이 화림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좋던데.
= 무속인들 사이는 위계가 세다. 선생님이란 게 다른 목적은 아니고 정말 그렇게 부른다. 선배를 어머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관객들이 두 사람의 외모나 행동거지를 보고 MZ 무당이라고 해줘서 재밌더라. 관련해서 언급되는 헬스클럽 장면은 복선이다. 뒤의 험한 것과의 육체적인 충돌이 나오니까 그들이 몸을 단련하고 체력을 기르고 있단 뉘앙스가 필요했다.
- 네 주인공의 합이 좋고, 밝혀지지 않은 전사나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한 까닭에 프리퀄이나 시퀄 연작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 영화적으로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기고 관객들이 원한다면 할 순 있다고 생각한다. 여건이 된다면 하지 않을까.
- 답변처럼 우회 없이 직진하는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크게 6개 챕터로 나눈 이유가 있나. 중간중간 휴지기가 생기면 속도감이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 오히려 직진하는 영화의 단점을 메꾸려고 한 시도였다. 시나리오 쓸 땐 챕터를 썼다가 없앴다가 했는데 편집하면서 제대로 넣었다. 다음 이야기에 대해서 미리 언질을 주면서 영화의 방향성을 확실하게 잡아줘야 관객들이 보기에 덜 불편할 것 같았다.
- 챕터가 ‘6개’인 특별한 이유는 있나.
= 딱히. (웃음) 원래는 7개였는데 마지막에 뺐다. 7번째는 ‘상극’이라는 제목이었고 마지막 야산 장면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제목이 7개나 나오니까 좀 피곤하더라. ‘또 나오네’라는 느낌이 들었다.
- 영화는 친일파 자손의 묘에 얽힌 이야기로 시작한다. 다만 뒤에 더 강렬한 게 나오다 보니 초반부 전체를 맥거핀이라고 말하는 평이 있다. 하지만 초반의 이야기도 분명한 맥락은 있으니 맥거핀이라고 여겨지지만은 않던데.
= 뭐 맥거핀이라고 표현하면 그럴 순 있겠다. 다만 난 어떤 부분이 맥거핀이라기보단 모든 게 다 ‘단계’라고 생각했다. 6개 챕터 동안 계속 이야기를 파고 파다 보면 점점 과거로 가는 하나의 단계를 거치는 거니까.
- 시나리오나 촬영 단계엔 있었는데 편집에서 덜어낸 이야기도 있나. 주인공들이 3년 전에도 어떤 일을 같이했다거나 화림이 일본어를 잘하는 전사 등을 관객들이 각자 추측하고도 있다.
= 인물들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3년 전에도 만났단 이야기는 시나리오의 효율성을 위한 작법이었다. 굳이 각자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화림의 일본 이야기는 시나리오에도 있었고 촬영본도 조금 있던 터라 뺀 게 아쉽긴 하다. 화림이 일본에 출장 가서 일본의 정령을 다루는 일을 배우고 능숙해지는 이야기를 넣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편집에서 덜어냈다. 실제로 한국 무속인들이 일본에 자주 일하러 간다. 일본엔 신사에서 일하는 형식적인 무당들이 대부분이고 한국 무당 같은 무속인이 드물어서다.
- 화면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면 보국사 창고에서 화림과 봉길(이도현)이 뚜껑 열린 관을 보고 식겁하는 장면에서 조명이 강렬하다. 화림은 보조광 없이 주광만 써서 얼굴에 음양 대조가 극도로 심하고, 벽에 비친 봉길의 그림자는 비현실적으로 커서 봉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 예리하네···. (웃음) 일부러 그렇게 했다. 봉길이의 서사에 복선을 주고 싶었다. 전구 조명을 하나 깨서 바닥에 떨어뜨려 만든 장면이다. 전반적인 조명 사용에 있어선 전반부와 후반부의 조명 컨셉을 완전히 다르게 가고 싶었다.
- 전반부와 후반부라고 하면 어떤 기준인가.
= 서사대로 전반부는 친일파 귀신이 나오는 부분, 후반부는 험한 것이 나오는 부분으로 나눴다. 전반부 조명은 뭐랄까··· 조금 어사무사하게 썼다. 전세계 심령사진들을 보다 보니까 귀신은 찍는 게 아니라 찍히는 거더라. 그래서 최대한 흐릿하게 나오도록 빛을 조금만 줘서 진짜 심령사진처럼 나오게 찍었다. 후반부는 험한 것의 실제 육체가 제대로 잘 드러나도록 의도했고.
- 험한 것이라 불리는 다이묘의 정체성을 어떻게 잡으려 했나.
= 우리 사이에선 타노스처럼 만들잔 얘기가 많았다. 왜냐하면 이게 그냥 몸만 움직이고 텅 빈 캐릭터가 아니다. 타노스처럼 뚜렷한 감정도 있고 본인의 아이덴티티도 있고 대사도 많은 악역이다. 훅 지나가는 현상이나 귀신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작중 언급처럼 ‘정령’에 가까운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 다이묘나 도깨비불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VFX를 최소화하고 특수분장이나 실제 촬영에 무게를 뒀다.
= 이런 영화들은 한번 붕 뜨기 시작하면 계속 방방 뜨게 돼 있다. 오컬트라는 게 판타지라면 판타지겠지만 리얼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감을 최대한 바닥에 붙여야 한다. 이런 부분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발악 같은 거였다. 다만 당연히 한계는 있기에 도깨비불은 30% 정도를 CG로 리터칭했고 상덕과 싸우는 다이묘의 모습도 배우가 여러 각도에서 다 촬영을 마친 후에 CG의 도움을 조금 받았다. 다이묘의 비주얼은 생각보다 게임같이 나오긴 했는데 가시성이 좋아서 정보 전달은 더 잘됐던 것 같다.
- 타노스 같은 빌런을 상덕이 직접 때려잡는 결말이 독특했다.
= 글쎄. 인물들이 귀신을 때려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화림도 다이묘를 없앨 순 없지만 잠깐 시간을 끌 순 있다는 정도로 말하지 않나. 실제 무속인들도 귀신을 잡는단 발상을 하진 않는다. 혼령을 달랠 뿐이다. 그런 현실의 범주를 벗어나고 싶진 않았고 내가 모르는 영역을 건들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마지막 장면은 상덕이 어쩌다가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거고.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격에 가까운 거지. (웃음)
- 개봉 전 인터뷰에서 현장의 감을 믿고 완성한 장면이 많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랬는지 궁금하다. 초반부 호텔에서 상덕, 화림, 지용(장손)의 대화 중간에 갑자기 천장 인서트가 들어가는 장면 등이 독특했다.
= 그 인서트는 대화의 결이 바뀌는 분기점이기도 하고 일종의 복선이기도 하다. 이후 호텔 장면에서 귀신이 등장할 유리가 나와야 하는데 갑자기 유리(거울) 숏이 등장하면 관객들은 컷이 인위적이라고 느끼면서 귀신의 등장에 감흥을 덜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천장의 유리를 한번 비춰주면서 관객들에게 비슷한 이미지를 인지시킨 거다. 다만 이런 장면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찍은 건 아니고 콘티 단계부터 있던 컷이다.
- 콘티엔 없었으나 현장에서 추가한 촬영도 있었는지. 앵글이나 사이즈 변화도 많았나.
= 아니. 현장에서 컷을 추가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숏의 앵글이나 사이즈 같은 것도 거의 콘티대로 갔다. 다만 전반적인 절차가 보통의 촬영-편집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콘티에서 정해놓은 순서대로 촬영한 컷들을 편집으로 이어 붙이는 과정이지 않나. 그런데 이번엔 어느 컷과 어느 컷이 붙으면 좋을지 미리 계산하지 않고 우선 다 찍었다. 한 신의 셋업을 쫙 깔고 나서 한번에 여러 컷을 촬영했다. 그리고 편집할 때 최종 컷을 다 골랐다. 지난 인터뷰 때 말한 것처럼 숏 하나하나의 완성도보단 편집의 힘을 내고 싶었다.
- 평소보다 힘든 촬영이었을 것 같은데. 현장 편집도 쉽지 않았겠다.
= 현장 편집본이랑 최종 편집본이 완전히 다르다. 이제 다시는 이렇게 안 하려고 한다. (웃음) 현장에서 편집에 대한 확신이 제대로 안 서니까 계속 불안감을 안게 되더라. 꽤 힘들었다. 결과적으론 예상보다 좋아진 신도 있고 안 좋아진 신도 있다. 다만 <파묘>라는 영화가 어떤 기운으로 밀고 가는 영화다 보니 이번엔 이런 방식이 잘 맞았던 것 같다.
- 파묘와 대살굿이 함께 진행되는 장면은 아주 많은 컷을 잘게 쪼개서 편집했는데. 이것도 같은 방식이었나.
= 그래서 카메라를 4대 썼다. 촬영감독도 4명 불렀다. (웃음) <검은 사제들>을 같이했던 고낙선 촬영감독도 도와주러 오고···. 내 머릿속엔 이걸 나중에 어떻게 편집해야 할지 대강 그림이 있긴 한데 최대한 컷을 많이 따는 게 중요하긴 했으니까.
- 대살굿 중간에 화림이 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떤 의도의 디렉팅이었나.
= 대살굿은 파묘 작업 중인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다. 그러려면 화림이가 자기 몸주신을 불러야 한다. 몸주신이 몸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를 본인 몸에 칼을 대거나 불에 손을 집어넣어서 확인한다. 이제 완전히 몸에 신이 들어왔단 걸 알고 나서야 피를 막 먹고 웃는 표정이 나온다. 몸주신한테 비타민C를 먹이는 거라고 보면 된다. 맛있고 영양 좋은 걸 먹으니까 씩 웃는 거지. 애드리브나 연기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실제 굿을 할 때도 그렇게 진행된다.
- 화림이와 종종 함께하는 할머니가 몸주신인 게 맞나.
= 맞다. 친할머니일 거고 실제로 무당들에겐 다 그렇게 몸주신이 붙어 다닌다. 화림이처럼 자기 가족도 붙고 어떤 장군님이 붙은 사람도 있고.
- 상덕 딸의 결혼식 장면으로 끝난다.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만 나오다가 산 사람을 위한 의식으로 마친단 뉘앙스가 흥미로웠다.
=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웃음) 기성세대 직업인과 젊은 무당들이 힘을 합쳐서 후손들이 살 땅을 지켰단 의미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상덕은 그전에도 계속 직업윤리를 언급하고 땅의 의미를 강조한다. 애국 포인트로만 흘러가는 걸 피하고 직업 포인트를 살리고 싶었다. 사회의 누구든 내 고향, 내 가족, 내 주위의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기저에 깔아놓으면 자신부터 바꿔 나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