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근의 사무실에는 자신이 유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여해 염을 도맡은 모습이 크게 인쇄돼 걸려 있다. 그가 대외적으로 얼마나 인정받는 장의사인지 확인되는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물임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오랜 기간 합을 맞춰온 영근은 무당 화림(김고은)의 소개로 같이 이장을 진행하게 된다. 상덕이 살핀 땅 위로 화림의 굿판이 한바탕 지나가면 영근이 슬슬 자리를 정리하며 묘한 기운의 관을 차에 싣는다. 영근으로 분한 배우 유해진은 “마치 이게 어떤 모습일지 상상만 하다 그 기괴하고 독특한 형태에 놀라게 만드는 심해어” 같았다며 <파묘>에 대한 인상을 생생히 전했다.
- 시나리오에 매력을 느껴 출연을 결심했다고.
= 사실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거나 그에 관심이 많진 않았다.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작품들을 많이 해왔고 그런 묘사를 통해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선호해온 편이다. 그런데 <파묘>의 시나리오가 워낙 좋았다. 읽으면서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자기가 자신 있는 장르에 잘 녹여냈다는 점이 놀라웠다. 보통은 하고 싶은 말을 작품에 직설적으로 담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장르적인 특성을 가져가면서 오락성도 놓치지 않는 신선하고 영리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어 하고 싶어졌다. 오컬트물만의 스산함을 느껴보고도 싶었고.
- 그런 호기심과 함께 경험한 현장은 어떻던가.
= 늘 재밌었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였으니까. 다만 신기할 정도로 현장에 깔린 분위기가 항상 스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보다 실제로 구현된 장면들이 많았다. <파묘>가 오컬트 장르고 혼에 관해 다루다보니 관객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CG 효과까지 더해버리면 관객이 작품과 더 멀어진다고 느끼리라는 생각을 감독님이 갖고 계시더라. 그래서 작품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CG 작업을 최소화해 진행됐다. 가령 후반부의 도깨비불도 불을 붙인 큰 공을 크레인에 매달아 계속 돌린 거다. 시나리오를 읽을 땐 당연히 CG 작업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머리 위에서 큰 불이 움직이고 있으니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몰입하기 편했다. 그 밖에 촬영하면서 ‘이게 어떻게 완성될까’ 궁금한 장면이 많았는데 결과물을 보니 감독이 참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 싶더라. 미장센이 잘 갖춰진 신들이 많았다.
- 영근은 사교성이 좋고 인맥이 넓어 중간에서 사람들을 서로 매끄럽게 연결해준다. 덕분에 크게 번지지 않고 해결되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 장재현 감독님과 영근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영근이 극의 진행자라는 것이었다. 상덕, 화림, 봉길(이도현)보다 사건으로부터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덕에 다들 파묘며 이장에 푹 빠져 있을 때 ‘이걸 왜 해야 되냐’고 관객이 떠올릴 법한 질문을 대신 건네곤 한다. 도망친 혼이 봉길의 몸속에 들어오도록 화림이 혼 부르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영근은 빙의된 봉길이 갑자기 튀어나가지 않게끔 봉길의 몸을 묶은 줄을 붙잡은 채 크고 작은 추임새를 넣는다. 감독이 말하길 그런 영근의 추임새가 있기에 지금 혼 부르기가 진행 중이고, 혼이 진짜로 도착했다는 것에 대한 관객의 믿음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 이처럼 사건에 힘을 불어넣거나 다른 캐릭터들이 힘들어할 때 슬쩍 뒤에서 밀어주고, 한두 군데 웃음을 주면서 쉼표도 찍고 장이 끝날 땐 마무리까지 해준다. 영근은 여러모로 극의 진행을 돕는 조력자로서의 느낌이 강하다.
- 파묘가 끝났을 때 인부들에게 주의 사항을 전해주는 등 주변을 살피는 것도 영근의 몫이다. 영근의 특성이 드러난 신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 개인적으로는 화장터 처마에서 혼을 보내면서 영근이 나지막이 노래하는 신을 좋아한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그 노래 하나로 한 챕터를 잘 정리해 끝맺는 분위기를 형성해준다
- 연기를 위해 국내 최고의 장의사를 찾아갔다고.
= 뭔가를 많이 배우기보다는 일이 손에 완전히 익은 베테랑의 느낌을 익히고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툭툭 던지는 손동작을 하며) 그런 전문가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척척 일을 해내곤 하지 않나. 그래서 가끔은 지나치게 디테일한 요소들은 오히려 무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장의사가 촬영 때마다, 특히 유골을 수습하거나 관의 매듭을 묶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현장에 오셔서 수시로 조언을 해주셨다. 그분의 손놀림 같은 것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고 옆에서 열심히 보고 배우려 했다.
- 마지막에 모두가 힘을 합쳐 험한 것에 정면으로 맞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영근이 앞장서 사건을 해결하진 않지만 제 몫을 제대로 해내야 하기에 배우 입장에서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을 듯싶다.
= 그 장면은 험한 것과 대결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상덕과 영근의 관계성, 상덕에 대한 영근의 마음을 잘 드러내야 했다. 험한 것에 맞서느라 크게 다친 상덕을 싣고 영근이 정신없이 소리치며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한다. 오랜 기간 둘 사이에 쌓인 정이 있고 그렇기에 더 크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영근을 표현하는 게 연기하는 사람으로선 더 중요했다. 어쨌든 끝까지 다 보고나면 <파묘>는 아주 개운하고 후련한 느낌을 준다. ‘나쁜 걸 뽑아야 한다!’라고 직접적으로 외치진 않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뽑아야 할 건 뽑고, 태워야 할 건 태워 없애버린다. 그래서 다 보고 나면 모든 걸 정화하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작품이다.
- 올해 또 공개 예정인 차기작이 있나.
= 두 작품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언급할 수 있을것 같다. <야당>이라는 영화인데 여기서 ‘야당’ 은 일종의 은어로 마약쟁이와 마약을 단속하는 수사기관 사이에서 딜을 하는 브로커를 가리킨 다. (유해진 배우가 야당인지 묻자) 그럴 것 같나? 다들 나쁜 역할은 나인 줄 안다니까! (웃음) 내가 무엇으로 등장하는지는 영화에서 확인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