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종말 앞에서도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 <종말의 바보> 김진민 감독
2024-05-02
글 : 조현나

유흥을 즐기고 약자를 갈취해 이득을 취하거나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소행성 충돌 200일을 앞두고 종말을 맞이하는 이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다. 김진민 감독은 “모든 인물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되 각자의 연속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말한다. “<인간수업>이 연출로서 내가 가진 능력을 확인해보는 작품이었다면, <종말의 바보>는 그 능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캐스팅부터 편집까지 세세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는 김진민 감독에게서 작품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 <종말의 바보>의 연출을 맡게 된 배경은.

= ‘정성주 작가가 글을 썼는데 읽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워낙 불세출의 작가고 한동안 대본을 안 쓰신 걸로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 읽어본 뒤에는 ‘이걸 진짜 시리즈물로 만들겠다고?’ 싶었다. 정성주 작가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 남다른 데다 감정을 깊게 다루는 편이고, <종말의 바보>가 다른 작품에 비해 덜 자극적이라 이게 흥행을 담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대본이 재밌었고, 하고 싶었다. 세계관이 크고 인물도 많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 걱정은 됐지만 뭔가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 원작 소설을 읽었나. <인간수업> 때는 촬영 전 여성학 논문을 찾아보는 등 공부를 한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도 참고한 자료가 있는지 궁금하다.

= 원작을 읽고 인물이나 대사 등 부분적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디스토피아물은 오히려 보지 않았는데 자칫하면 작품이 너무 어두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종말의 바보>는 재난 상황이 배경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생이 몇달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인간의 존엄은 그리 멀리 있지 않고, 우린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작품의 메시지를 어떻게 잘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래서 영상물보다는 고전을 많이 접했다. 작가님이 언급했던 <우리 읍내>부터 시작해 <레미제라블> <돈키호테> 등을 머리 식힐 때마다 읽었는데 연출할 때 좋은 자양분이 됐다.

- 재난을 재현할 때 세운 기준이 있나. 사고로 죽은 아이들, 범죄에 휩쓸린 아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가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를 구현할 때 중요하게 여긴 게 있다면.

= 내란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졌을 때 작가님은 결국 약자 중 한축인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거라고 봤던 것 같다. 과거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작가님의 비판 의식 또한 여기에 담겼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하진 않았다. 자칫하면 종말을 앞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전부 덮이면서 이야기가 길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집에 공을 들였다. 드러낸 부분도 많고 신 배치도 달리해보고, 평생 이렇게 열심히 편집해본 적이 없다.

- 현실감을 위해 미술에 공을 들인 것이 느껴졌다. 미술팀을 비롯한 제작진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 여러 측면을 살펴야 했다. 2025년이 배경이라 의식주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겠으나 공급망은 다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그럼 불편함의 정도는 어떻고 사람들은 어디에 자리 잡고 살고 있을까. 파괴된 것과 파괴되지 않은 것은 무엇일지 분리하고 상황을 논리적으로 맞춰가는 데에만 서너달 정도 소요됐다. 아파트 재건축을 앞두고 사람들이 희망에 가득 차 있었는데 갑작스레 종말이 도래했다면, 이를 마주한 인물들을 통해 시청자들이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재건축 아파트를 비롯해 여러 장소가 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가 웅천시 시청과 시청 앞 광장이다. 이곳에서 대규모 프로덕션이 필요한 폭동 신, 추도 미사 신을 촬영해야 해서 로케이션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듯하다.

= 처음엔 추도 미사 장면과 폭동 장면을 각각 다른 곳에서 찍으려고 했다. 그러다 인천에서 그 로케이션을 찾았는데, 몇번 들르면서 장소를 합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와 대조되는 미래지향적인 건물을 하나 섭외해야 근미래라는 배경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미술감독님이 말씀하셔서 최종적으로 낙점됐고, 그렇게 세계관이 완성됐다. 이후로 낡은 빌라 단지와 부유한 주택가 등 경제적으로도 연령대별로도 다양하게 장소와 인물의 설정을 확장해나갔다. 폭동 신과 추도 미사 신을 촬영할 때엔 워낙 인물이 많아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설계하고 오브제를 어디에 둘 것인지, 엑스트라들은 어떻게 운용할지에 관해 조연출들과 미술팀, 스태프들이 의견을 줬고 그 아이디어들이 디테일하게 적용됐다.

- 이웃과 텃밭을 가꾸는 등 남은 시간을 타인과 함께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극에 따뜻함을 더한다.

= 일상성 유지의 중요성을 평소에도 인지하고 있는 편이다. 아파트 단지가 아닌 마을을 이룬 곳에 살고 있어 텃밭을 가꾸는 것과 같은 모습이 익숙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런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실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건데 지금은 다들 살기 바빠 잊고 지낸다. 없어진 줄 알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일상의 풍경들을 의식적으로 많이 넣고자 했다. 남아 있는 시간보다 사람들이 얼마나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면 시청자들에게도 자연스레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종말을 앞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까’라는 상상을 배우들이 촬영하며 많이 나눴다고 들었다. 연출자로서도 스스로에게 던져본 질문일 듯한데.

= 현장에서 그런 생각을 나누던 배우들의 연령대가 주로 30~40대다. 50대가 넘어가거나 10대, 혹은 그보다 어린 아역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삶이 20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겐 잘 실감이 나지 않고 어른들에겐 그리 와닿지 않는 반면, 중간 나이대의 사람들은 크게 반응하는 것 같다. 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다. 이미 50년이나 살아봤으니까. 그래서 <종말의 바보> 배우들을 보면서 미국식 디스토피아물에 묘사된 감정들,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상황이 전부 사실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선 중학생 이하 나이대의 아이들이나 김영옥 선생님이 맡아주신 것과 같은 위치의 노인들이 나오지 않는다. 각색을 통해 이렇게 다면적으로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설정한 것을 보면서 정성주 작가가 정말 대단하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