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공개를 누구보다 기다렸을 것이다. 배우 김윤혜가 <종말의 바보>에서 맡은 전투근무지원 대대 중대장 ‘강인아’는 그만큼 근사하다. 투블록커트의 카리스마는 일부일 뿐, 지구 종말을 200일 앞둔 상황에서 시민과 동료와 친구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인아의 직업윤리는 그를 더욱 품위 있게 한다. 인아의 얼굴이 어둠과 햇빛에 가려져도 김윤혜의 크고 진한 눈은 살아남아 디스토피아를 비추는 횃불이자 손전등이 된다. 2002년에 데뷔해 <점쟁이들> <빈센조> 등에 출연해온 김윤혜는 주연작 <씬>과 <종말의 바보>를 선보이고 차기작 2편까지 촬영 중인 올해를 분기점으로 삼고 있다. 작품 공개일이 가까워질수록 “또래 배우들과의 즐거운 작업, 김진민 감독님만의 편안한 작업 방식” 하나하나가 생생히 기억난다고 전했다.
- 강인아는 김윤혜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본 적 없는 도전적인 캐릭터다.
= 이야기가 재밌을 때 캐릭터도 입체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종말의 바보>가 딱 그랬다. 오디션 때문에 대본을 짧게 읽었을 때부터 대사 하나하나가 절절히 아리고 극한상황에 내몰린 인물들에 감정이입이 잘돼 간절하게 붙고 싶었다. 대본에서도 인아는 우직하고 책임감이 강한, 분명 멋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건 항상 감정을 누르고 어깨에 짐을 이고 사는 사람의 힘듦이었다. 그런 인물의 복합적인 면을 배우로서 잘 살려보고 싶었다.
- 군인, 친구, 딸일 때 인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무게가 각기 달랐던 게 이해가 간다.
= 친구들과 있을 땐 좀 풀어지더라도 인아와 세경(안은진)이 단둘이 붙는 신에서만큼은 인아가 세경을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지게끔 연기했다.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지키고자 위험한 일에 뛰어들려는 세경과 그를 막으려는 인아의 감정 신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안)은진 배우의 감정이 풍부해서 나도 더 진심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모녀 관계에 있어서 인아의 마음은 더 복잡하다. 오빠만 위하던 엄마에게 상처도 있지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큰데 인아는 그걸 다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차가운 톤을 가져가려고 했다.
- 군인 역할이라고 해서 마초적인 면을 부각하기보단 규율을 중시하는 직업적 특성을 담백하게 체화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 뭔가를 많이 하려다 보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캐릭터라 최대한 덜어내고자 했다. 인아의 강단 있는 면모가 직접적으로 드러났으면 싶어 머리만 바짝 잘랐다. 일부로 굵은 목소리를 내거나 딱딱한 말투를 쓰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직업군인인 형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중대장다운 행동이란 무엇이고 총은 어떻게 다루는지 세세하게 물어보면서 디테일을 만들어나갔다. 특히 신경 쓴 건 경례였다. 자주 나오는 경례하는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으면 시청자가 인아를 어색해할 것 같았다. 경례를 경례처럼 보이게끔 하는 각도가 있다고 형부가 팁을 주어 그 각을 배웠고 ‘오늘은 내가 경례 100번 채우겠다’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연습했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나 윗사람과 아랫사람에게 하는 경례 방식에 차이를 두지 않는 것으로 인아의 공명정대한 성격을 보여주고 싶었다.
- 인아가 친구들과 와인을 나눠 마시면서 “마지막 순간에도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신을 찍으면서 종말을 앞둔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해보기도 했는지.
= 내 끝은 처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디데이가 얼마 안 남은 걸 확인하면서 하루에도 몇번씩 무너져내렸다가 괜찮았다가를 반복하며 힘들었을 텐데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와인 신에서처럼 편안했으면 싶다. 촬영하면서 종말을 앞둔 200일 동안 나는 뭘 할 수 있을지를 수시로 고민했다. 아마 인아처럼 혼란 속에서도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키고 그들이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어루만지는 역할을 했을 것 같다.
- 오늘 이야길 듣다 보니 인아는 김윤혜 배우를 닮은 캐릭터였던 것 같다.
=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는 점도 그렇고 여러모로 나랑 비슷한 부분이 꽤 많다고 느끼면서 촬영했다. 평상시엔 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한다. 좋은 일에 들뜨지 않고 나쁜 일이 생겨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 게 습관이 돼 이젠 마인드 컨트롤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다.
- 그 덕분에 20년 넘게 한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물론 일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엔 어렸고, 모든 게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와 돌아보면 무탈하게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지나온 시간을 괴롭고 고생스러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진 않다. 과거는 ‘맞아, 그 작품 찍을 때 나 참 좋았어, 괜찮았어’ 정도로 한편에 잘 정리해두고 현재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럴 힘을 <종말의 바보>를 찍으면서 얻기도 했다. 감독님이 “너 자신을 믿고 가면 좋겠다”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 말이 의지가 돼 무엇이든 일단 해보자는 적극성이 생겼다.
- 차기작인 시리즈 2편 <정년이>와 <인사하는 사이>를 동시에 찍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 <정년이>는 체감상 70% 정도 찍은 것 같다. 1950년 ‘매란국극단’의 최고 여역 배우이자 야망 있는 여성 서혜랑 역을 맡았다. 그간 한국무용과 소리를 기본기부터 익히는 일에 정성을 쏟았고 다 같이 국극 장면을 만들어나가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인사하는 사이>는 막 시작해 10%도 안된 것 같다. 동화작가이자 7살짜리 남자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 ‘수현’은 씩씩하고 엉뚱한 친구다.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밝은 에너지를 받아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 앞으로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액션이 주가 되는 작품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