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아바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까지 기술적 성과를 이룬 작품들의 엔딩크레딧에서 에릭 윈퀴스트 VFX 슈퍼바이저의 이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2002년 독보적인 VFX 스튜디오 Wētā FX에 입사해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에릭 윈퀴스트는 현재 팀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으로 아카데미 시상식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시각효과상에서 후보 지명을 받았으며 실제 촬영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개발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혹성탈출> 리부트 삼부작(<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이어 7년 만의 속편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도 VFX 총괄을 맡은 에릭 윈퀴스트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본편 프롤로그를 볼 수 있었던 푸티지 시사회 당일 윈퀴스트를 만나 작품 속 놀라운 시각적 향연에 관해 물었다.
- 웨스 볼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VFX가 필요하지 않은 숏은 3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전한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의 시각효과의 영향력이 궁금해지는 답변이다.
= 정확히는 38개다. 이번 작품에서 VFX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우리 입장에서 단순하게 작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들만 나오는 신은 극히 일부였고 장면 대부분에 VFX 효과로 완성해내야 하는 유인원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작업량이 많았음에도 그나마 덜 힘들었던 건 웨스 볼 감독 덕분이다. 감독은 SF영화 <메이즈 러너> 삼부작을 맡아 성공한 경험이 있어 디지털 툴을 비롯한 관련 지식에 훤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확한 가이드를 주었고 후반에 가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바뀔지 미리 주의도 줬기 때문에 각오하고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웃음)
- 새로운 캐릭터 노아(오언 티그)를 포함한 유인원들의 생활 터전은 무성한 풀숲이다. 프롤로그에서 이파리 하나하나가 다르게 흔들리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 풀, 물, 불, 흙, 바람까지 온갖 자연적 요소들이 다 있어 쉽지 않았다. 언급한 부분에 관해 말을 잇자면 바람이 부는 경우 그 바람에 영향을 받은 나무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시뮬레이션 작업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영화의 주된 배경이 항상 바람이 부는 야외라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메인 캐릭터가 유인원이지 않나. 털이 계속 미세하게 날리는 상태가 기본값이다 보니 이래저래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난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Wētā FX만의 독자적인 기술인 ‘피스라이트’(Physlight)가 한 단계 발전했다. 실제 촬영장의 밝기와 색상을 디지털 환경에서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한 끝에 애초 생각했던 정확한 이미지가 나와 만족스럽다.
- 불과 물의 요소도 많이 쓰인 것 같더라. 물에 젖은 털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특히 까다롭다고 알고 있는데 어땠는지 궁금하다.
= 프롤로그에서 노아가 사는 마을이 프록시무스(케빈 듀랜드)의 습격으로 큰불이 나는 장면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시드니와 그 주변이 주요 로케이션이었는데 실제 불을 군데군데 갖다놓은 야외 현장에서 배우들이 안전장치를 한 상태로 촬영한 뒤 나중에 디지털로 불을 입혔다. 그 과정에서 불이 가진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캐릭터들이 횃불을 들고 다니는 신이 꽤 많았는데 이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횃불은 시뮬레이션 세팅 단계 때부터 정교하게 계산을 맞춰야만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물이었다. 물은 급류, 해안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홍수 등 종류가 워낙 다양해 데이터가 방대하고 상당한 연산력이 필요해서 결과물 하나를 보는 데도 수일이 걸렸다. 물에 젖은 유인원 작업이란 가뜩이나 어려운 물 작업과 그 못지않게 까다로운 털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젖은 털들의 뭉친 정도, 털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크기까지 디테일하게 잡아내야만 했다.
- 새털 작업은 어땠나. 이번 작품에선 유인원 부족이 독수리를 길러 새의 비중이 꽤 높았을 것 같다.
= 몇년 전, DC 코믹스의 <피스메이커>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애완 독수리가 나와 경험이 있긴 했다. 그러나 당시는 깃털 툴세트에 관한 개발이 만족스러운 단계가 아니였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건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촬영 전에 만난 호주 독수리였다. 팀원들이 독수리를 팔에 올려놓고 무게가 어떤지를 직접 느껴보고 고공비행에서부터 착지까지의 과정을 하이스피드로 촬영한 뒤 새의 움직임과 깃털의 형태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런 시간을 한번 거쳤기 때문에 사실적인 독수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 오언 티그의 노아는 <혹성탈출> 리부트 삼부작에서 활약한 앤디 서키스의 시저와 어떻게 다른가.
= 일단 노아는 어리다. 고립된 마을에서 태어나 바깥세상을 궁금해하지 않는 장로들 손에 길러진 탓에 아는 게 많지 않다. 순수한 10대라는 점이 태생적으로 진지하고 충분한 진화를 거쳐 나이 든 시저와는 다른 인상을 풍길 것이다. 노아를 담당한 아티스트들은 피부의 톤이나 털의 질감에서 젊은 기운이 느껴지도록 신경 썼다. 휘둥그레한 눈과 어리숙한 움직임을 통해 노아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자 했다. 오언 티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노아가 성장에 중점을 둔 캐릭터라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고 현장에서 몰입감이 남달랐다. 그 덕분에 노아가 시저 2.0 버전이 아닌 고유한 노아가 될 수 있었다. 노아는 시저와는 다른 여정을 겪지만 결국 시저만큼 훌륭한 리더로 성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