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암실, 영화, 그리고 몸에 남는 것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2024-05-29
글 : 김예솔비

생존이 곧 무기가 되는 삶. 누군가가 여기 존재한다는 단순한 현실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이미지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르포르타주는 사회적인 현실에 대해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은 객관적 서술과 그 자료들을 가리키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탐사하는 이미지는 결코 객관적인 상황만을 보여주도록 길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를 촬영한 제이컵 리스의 사진은 단순히 빈민가의 실태를 알린다는 목적을 넘어 그 자체로 정치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둠으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려는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

낸 골딘의 삶-투쟁을 다초점의 이미지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향하는 곳 또한 어둡고 눅눅한 암실이다. 70년대 뉴욕 바워리의 밤, 지하 클럽에 모여 취해 있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쇼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사진에 등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열렬히 반응한다. 환호와 폭소, 혹은 소란을 틈타 대화를 가장한 실시간 비평이 이루어지는 중. 이곳의 어둠은 친밀하고, 시끄럽고, 끈적하다. 그 현장의 생생한 일부이면서 집요한 기록자였던 낸 골딘은 자신의 일상과 친구들을 찍은 사진으로 어둠과 빛을 반전시키는 사람이다. 아니, 그보다는 어둠을 기준으로 어둠 너머를 소외시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뉴욕 빈민가를 촬영했던 리스가 관찰자로서 이미지를 대했던 것과 달리, 낸 골딘의 사진은 퀴어, 에로티시즘, 소수자들로 둘러싼 세계의 비가시적 층위를 증언하는 공공의 일기장에 가깝다. ‘사라짐에 저항하기’라는 전략.

지하 클럽의 어둠과 같이 사적인 자리에서 상연되던 이미지가 미술관이라는 공적인 장소로 옮겨질 때 발생하는 효과는 낸 골딘의 사진이 가진 힘으로 논해지고는 했다. 낸 골딘에게 미술관은 권력이 작동하는 장소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의 주요한 축으로 등장하는 액티비스트 집단 페인(PAIN)의 활동 또한 미술관에 막대한 힘을 행사하는 새클러 가문을 저격하고 있다. 새클러 가문이 운영하는 퍼듀 제약회사는 그 위험을 알면서도 중독성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적극적으로 유통했고, 이를 통해 부당한 부를 축적했다. 오피오이드 중독으로 고통받았던 낸 골딘은 동료들과 함께 미술관에서 새클러의 이름을 끌어내리기 위해 분투한다. 한 가문의 실추를 위해서가 아니라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착취하여 벌어들인 자본에 의탁하는 미술계와 사회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투쟁이다. 영화는 낸 골딘의 사진 작업과 액티비즘 실천을 교차시키거나 겹쳐놓으면서 낸 골딘의 삶-투쟁을 다초점의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강조하자면, 이 영화는 낸 골딘의 전기영화는 아니다(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라는 제목 앞에 굳이 낸 골딘의 이름을 덧붙인 국내 개봉명은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영화는 낸 골딘을 중심으로 페인의 활동과 일대기를 담아내는 전형적인 르포영화일 수도 있었고, 그녀가 지나쳐온 삶의 굴곡을 그녀의 사진과 나란히 놓는 다큐멘터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부분적으로 이러한요소들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경로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심지어 낸 골딘의 성장과정과 가정사는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의 언니 바버라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또한 영화는 그 자체로 ‘영화적’인 효과를 지닌 낸 골딘의 사진을 과도하게 인용하지 않으면서, 마치 그곳으로부터 모종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듯이, 가까스로 원심력을 발휘하여 주변부로 배회하고 있다. 낸 골딘의 사진이 내부와 외부, 일상과 예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급진적으로 반전시키면서 거의 ‘몸’ 자체로 부딪히려 하는 것과 달리, 영화는 섣불리 그 힘에 편승하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단순히 낸 골딘의 삶이나 행적을 스크린이라는 시공간으로 옮겨올 때 굴절하는 힘에 모든 것을 내걸지 않는다. 그녀의 사진이 사적인 것을 공식화하는 전략만으로 전복적 힘을 가진 반면,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을 재구성하면서 훼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게끔 만드는 장치를 고민해야 하는 산만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거의 헐겁게 맞붙는 이야기를 접합부 없이 교차시키는 영화의 형식으로 인해 가장 축소되는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낸 골딘이다. 이 말은 영화가 과도한 부풀리기를 통해 한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그녀의 작업적 성취를 과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서 낸 골딘은 소외된 존재들을 중개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물로서 재구성된다. 소수자들, 특히 여성 창작자의 작업은 그 사람이 가진 독자적인 창작의 결실이라기보다 이것과 저것을 매개하는 영매나 더 큰 성과를 가능하게 한 구심점으로서 다뤄져왔는데, 이 영화는 그런 장소화의 충동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의 틈 속에서

적어도 이 영화는 낸 골딘의 사진이 ‘영화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그 사진들을 순진하게 영화에 끌어들여올 때 사진적인 감흥을 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사진의 영화적 인용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사유하면서 희한한 방식으로 ‘사진에 관한 영화’가 된다. 동시에 이 영화는 낸 골딘의 사진과 행적을 빌려 투쟁이라는 양식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삶을 장악할 수 있는지, 고통과 의존, 자립이 비선형적으로 얽혀 있는 구조적인 문제인지 드러내려 한다.

소수자의 삶을 기록하는 가시화 전략이 예술로서 유효한 저항이 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현실을 증언하는 사진의 힘 자체가 마모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현실의 벽이 더욱 교묘해져서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데 능숙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낸 골딘을 경유해 이미지와 몸을 거의 등치시키고, 몸으로 가능한 저항의 방식이 남아 있는지 묻는다. 페인의 주된 시위 방식이 미술관을 점거해 죽은 것처럼 누워 있으면서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새클러의 기부를 철회한 미술관들이라는 투쟁의 성과를 보여준다. 물론 이 성과는 모든 차별과 억압, 자본주의에 대한 영속적인 승리가 아니라 찰나의 성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기적이라는 드라마를 묘사할 수 있는 영화의 능력을 빌려, 투쟁과 승리라는 두 사건을 최대한 가까이 맞붙인다. 미래 혹은 희망이라는 말로 미루기에는 한없이 피부에 접촉해 있는 이 가능성의 지대에 하나의 암실을 덧붙이고 싶다. 지난해 10월 미성장이라는 모텔을 점거해 여성, 퀴어 작가들이 모인 전시 <모텔전: 눈 뜨고 꾸는 꿈>이 열렸다. 가져갈 수 있는 도록이 없었고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할 수도 없었으며 단 12시간 동안만 열리고 닫혔던 시공간에서 관객은 온몸의 감각과 기억을 적극적으로 개방해야만 했다.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의 틈, 시간이 아닌 시간 없음 속에서 흠뻑 흡수하고 빠져나온다. 그리고 몸에 남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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