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대학살 이후 79년, 영화의 역사는 홀로코스트 재현 가능성과 그 방식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고민하고 진화하며 더욱 풍부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고통과 재난을 다루는 영화 형식에 중요한 분기점을 가져온 작품들이 있다. 이들의 궤적을 토대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살펴보았다.
밤과 안개 1955
초기 홀로코스트 영화는 기록 영상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독일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결 10년 후, 강제이송과 강제수용소를 다룬 32분짜리 단편다큐멘터리 <밤과 안개>(감독 알랭 레네)는 이전까지 개인의 고통을 발화하고 집단적 기억으로 소환하기 어려웠던 홀로코스트를 예술의 위치에서 다룬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일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 이후, 홀로코스트의 미학적 재현 가능성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다. <밤과 안개>는 흑백의 수용소 기록 영상과 (트래킹숏으로 촬영한) 컬러의 현재 수용소의 모습을 교차 구성해 거리를 유지한다. 하지만 합의되지 않은 타인의 고통을 직접 폭로하는 다큐멘터리는 외설성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밤과 안개>가 불러온 홀로코스트 재현 윤리에 대한 고민은 알랭 레네 감독이 트라우마의 시각화가 가능한 형식을 허구 극영화에서 찾은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생존자들의 증언으로만 구성한 다큐멘터리 <쇼아>로 이어진다.
소피의 선택 1982
윌리엄 스타이런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소피의 선택>(감독 앨런 J. 퍼쿨라)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소피(메릴 스트리프)의 분열적인 자아를 경유해 전쟁의 참상을 소환한다. 소피의 아버지는 나치주의자였고, 소피의 아버지와 남편은 독일군로부터 총살당한다. 소피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끌려가기 직전 아들과 딸 중 누구를 살릴 것인가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놓이고 딸을 포기한다. 이후 미국으로 넘어간 소피는 유대인 과학자 네이선과 만나 격렬한 사랑에 빠지고 한동안 풍요로운 삶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네이선 또한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며 소피를 학대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이자 모성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피의 내면이 대변하는 역사적 상흔은 남성이 아닌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읽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유대인 피해자가 술, 마약, 섹스에 탐닉하는 파격적인 묘사가 당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의 내면이 곧 역사적 사건 자체를 옮겨낼 수 있다는 단정은 홀로코스트의 복합성을 단순화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쇼아 1985
아도르노의 선언은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성에 얽힌 논쟁을 촉발했고, 이에 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내놓은 답은 11년간 생존자, 방관자, 사형 집행인들을 인터뷰한 기록을 담은 556분짜리 영화였다. 홀로코스트가 시각적인 이미지로 옮겨질 수 없는 재난이라면, <소피의 선택>같은 가상의 클라이맥스를 상상하거나 <밤과 안개>처럼 과거의 한순간을 가져오는 행위 자체가 참상의 진실을 가리게 한다. <쇼아>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부정한 클로즈 란츠만은 자료 화면이 “상상력 없는 이미지”이며 아우슈비츠를 언급하기 위해 이를 동원하는 것은 “외설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쇼아>는 기록 영상과 주석을 배제하고 오로지 인터뷰로만 대학살의 현장을 묘사한다. 심지어 인터뷰이들의 말에 앞뒤가 맞지 않거나 기억이 모호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를 가감 없이 보여주며 그 자체가 역으로 트라우마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클로드 란츠만에게 재난을 영화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존자의 진술이 관객에게 각자의 아우슈비츠를 상상하게 만들고 해석하게끔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쇼아> 같은 방식으로만 재난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세대를 넘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고 집단의 기억으로 자리해 역사화하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쉰들러 리스트 1993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 유대인이자 그의 먼 친척 또한 아우슈비츠의 희생자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쉰들러 리스트>는 평생의 과업이었다. 나치 당원이자 군수품 제조업자였지만 유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1100명의 목숨을 살린 실존 인물 오스카 쉰들러의 생애를 다룬 동명의 소설에서 출발, 56개국 5만2천명의 증언을 조사해 역사를 고증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아우슈비츠와 그릇 공장,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와 애몬 괴트(레이프 파인스) 등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를 가져와 대중이 복잡한 재난 양상을 쉽게 받아들이게끔 한다. 한편 영상은 글보다 사건의 존재를 확실히 증명하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기술이나 구술보다 홀로코스트의 기록 영상 혹은 이를 봤을 때의 감정적 파장을 목표로 삼은 영화 이미지는 재난 사실을 훨씬 흡인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 <쉰들러 리스트>는 프랑스에서 교육용 영상으로 활용됐던 <밤과 안개>나 일부 시네필 및 연구자들이 주로 접했던 <쇼아>보다 훨씬 대중적인 문법으로, 주류 할리우드 시스템의 권력을 전폭적으로 이용하며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알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오스카 쉰들러를 영웅화한 휴머니즘적 접근이 홀로코스트의 실체를 오히려 단순화해버렸고, 특히 클로드 란츠만 같은 이들은 스필버그의 연출력이 대학살을 ‘볼거리’로 전락시키며 결국 재난을 외설화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사울의 아들 2015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쇼아의 재현 불가능성이 “‘암흑의 구멍’을 성스러움 중 성스러움으로 취급해 접근 불가하고 손댈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고 형상화할 방도가 없는 환영의 공간으로 만든다”고 비판한 바 있다. <사울의 아들>은 그간 아우슈비츠 영화들이 윤리적 고민 끝에 우회적으로 비켜갔던 공간, 즉 가스실로 카메라를 놓는다. 좁은 화각과 얕은 심도의 중심에는 죽은 아들(이라 주장하는)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려고 애쓰는 존더코만도 ‘사울’이 있다. 오로지 아들의 시체에만 몰두하는 사울의 시점숏 혹은 그의 클로즈업이 프레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시체처리실의 참상은 아웃포커싱되어 제시된다. 이는 관객이 그의 심리를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재난을 스펙터클화하고 아우슈비츠를 타자화하는 비윤리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영화 형식을 제안한다. <사울의 아들>이 “‘군림하는 어둠’에 빛을 비추며 존재했던 지옥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하나의 미적 응답”이었다고 읽은 위베르만의 분석처럼, 이 영화는 이전 세대의 재현 불가능성을 넘어 무엇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고민하는 새로운 세대의 과제를 발동한다. 20세기의 아우슈비츠 금기에 도전하는 일련의 태도는 나치와 히틀러를 선망하며 유대인을 괴물화하는 10살 소년 조조의 성장 서사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조조 래빗>, 가해자의 평온한 일상이 암시하는 유대인의 절멸을 상상하게 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